[이 시대의 수필가 11인] 장금식 '결로현상'
주간한국 7월1일자 31면 게재
싸한 바람이 냉기를 불러온다. 욕실이다. 외부와 맞닿은 내부 벽면과 천장 쪽에 수증기 방울이 몽글몽글 맺혀 있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벽면 표정 읽기가 못내 성가시다. 벽이 우는 것 같은데 뭐가 그리 서러운가. 보는 내가 서러운가. 올려다보니 물방울이 눈물방울로 보인다.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커 생기는 결로현상이다.
생길 때마다 닦아주지 않으면 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 아닌 물방울. 닦아도 조금 지나면 내 수고를 비웃듯 벽이 축축하다. 차가운 것이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이 떨어지며 부서져 바닥에선 모양 없이 그냥, 물이다. 언뜻 두려운 공포감이 든다. 물방울이 모여 엄청난 물이 고이고 급기야 욕실을 채우고 나서 거실까지 넘어오면 어떻게 감당하나. 혼자 해결해야 할 짐이 버거워진다.
겨울 욕실 풍경엔 끈적한, 축축한, 흩어진, 온기 없는 공간의 설움이 배어있다. 게다가 환기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꽃을 피워 여기저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내벽은 밖을 받아들이지 않고 왜 거부하는가. 그러면서 약간의 미련 때문인지 완전히 밀어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사람을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영원한 송별을 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다. 겉으론 '인생무상, 죽고 사는 게 뭐 별건가' 운운하며 철학을 말하듯 담담하게 얘기하나 속은 그렇지 않다. 그럴수록 더 그리움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
내면의 나와 외면의 나, 둘의 온도 차는 시간이 갈수록 크다. 겨울이 끝나고 봄꽃이 내 마음을 환히 밝혀도 안구가 습한 건 여전할 듯하다. 보이지 않는 나를, 내 감정을 자꾸 은폐하려 하면서 방황한다. 외면은 숨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둘의 관계는 장맛비 내릴 때 나뭇잎으로 막힌 배수로 같다. 빗물이 빠지지 않아 지상에서 회오리치듯 거칠게 회전하는 것처럼 헛돌기 과정의 연속이다. 내면의 혼란은 외면에 소리치며 빠져나가려 하나 소통 없이 서로 존재의 모호함만 확인한다.
마음의 거울에 내면을 비춰보나 거울 뒤로 자꾸 숨고 싶어진다. 겉과 속이 서로를 의심하며 환기 없는 갑갑한 공간을 만든다. 내적 소극성과 외적 포장의 대립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내가 나를 밀어낸다. 억지 힘으로 결로를 밀어내려니 더욱 벅차다.
남편과 사별 후 2년이 지났다. 딸은 회사 근처 오피스텔로 옮겨 편히 지내라고 진즉에 내보냈고, 아들에겐 독립할 나이가 됐으니 혼자 나가 살아보라고 최근에 내보냈다. 그게 내 진심이었을까, 의심도 가지만 일단 나 홀로 살겠노라고 저질렀다. 최근까지 함께 살던 아들마저 독립시키니 첫 한 달 동안은 안절부절 혼란과 불안이 거듭돼 눈물로 지새웠다.
아들딸이 "엄마, 괜찮아?" 하고 물으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너무 편하고 좋다"고. 겉과 속이 다른 나의 말과 행동은 어쩌면 자신을 스스로 배신한 부정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방학 때면 남편과 늘 여행만 다녔던 내가 이제 홀로, 외로이, 더욱 셀프 외로움의 처소를 지키는 지킴이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나에게 이득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그저 진절머리나게 외로운 감정 끄나풀 하나만 남는다. 아들딸을 실제 심리적 추방까지 하고 자신마저 내쫓고 어두운 감정 카테고리에 가두어버리니 내적 외적 두 자아는 쉼 없이 충돌한다. 왜 그렇게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눈물을 빼야 하는지. 어쩔 수 없었어. 자식들도 다 각자 인생을 살아야 하니 마냥 어미가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화장실 문턱에서 다시 욕실 내부를 바라보며 습기 가득한 공기에 화들짝, 문을 닫아버리며 거실에 주저앉는다. 외부에 집중하자고 말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린다. 내가 나를 잠식할 수도 있겠구나. 흐릿한 두려움이 작은 장벽이 될 수 있을까 봐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벽면을 타고 내려오는 물방울 닦기에 혼신을 기울인다. 무의식의 나만 존재하면 내가 하나일 텐데 둘의 내가 나를 괴롭힌다. 둘 사이 진실이 없어 소통 부재로 결로현상을 점점 키운다. 볼수록 자기연민과 삶의 비루함에 지친다. 어찌 보면 뽀송뽀송한 벽과 환한 빛 비춰주던 옛날이 그리워 그럴지도 모르겠다.
두 명의 나를 해체하는 방법, 결로 없애기. 나를 무화(無化)하는 방법은 뭘까? 죽은 남편을 불러올 수 없다. 내보낸 자식을 도로 불러들일 수도 없다. 사진첩을 꺼내 품에 안고 그리움의 세계로 빠져드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거실의 따뜻한 기운을 화장실 벽면과 마주하게 해주면 눈물방울이 줄어들려나. 아이들에게 그냥 힘들다, 외롭다, 아프다 등 있는 그대로의 날 감정을 보이면 괜찮을까.
아니야. 고개를 흔든다. 내면의 습하고 축축한 감정 차단용으로 남편이 떠오르면 바로 기도와 명상을 하면 낫겠지. 이것도 아니야. 기도하면 자꾸 잡념이 들어와 집중이 안 된다. 환기를 자주 해볼까. 문을 온종일 열어놓듯 나를 활짝 열면 겉과 속마음의 온도 차가 줄어들까. 추워도 문 열고 바깥으로 나가면 기분전환이 되고, 육체는 정신에 정신은 육체에 서로 빈 곳을 채우며 상부상조할 수 있으려나.
결로를 막을 방법이 이론상으론 여러 개가 있다. 그 모든 게 아직 몸과 마음으로 들어와 체화되지 않는다. 애도의 시간이 충분치 않은지, 아예 결로를 제거하고 싶지 않은지 어떤 것이든 섣불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외부의 내가 내부의 힘을 뺏고 내부의 내가 외부의 힘을 앗아가더라도 내적절규만 있을 뿐, 수긍이 힘들다. 슬프게도 나는 내가 나의 경계선을 정하지 못한다. 어수선함의 카오스가 내 집이고 내 욕실이다. 결로를 막으려 애쓰기보다 당분간 결로와 함께함이 더 나을 것 같다. 결로, 이슬 맺힘이라는 뜻처럼 몽글한 서정, 긍정의 신호를 부르기엔 아직 이르다. 감정이 더욱 단단해지기까지는 두 개의 나로 살아야 할까 보다.
앞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가슴에 파고든다. 바람이 세지고 가슴은 웅크린다. 골이 진 가슴 사이사이 그리움과 슬픔이 다 삭혀질 때까지 결로는 진행 중이다.
◆장금식 주요 약력
△경북 칠곡 출생 △'계간수필'(2014) 등단 △수필집 '내 들판의 허수아비' '프로방스의 태양이 필요해' △현재 '인간과문학'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