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서미숙 '뜨개질하는 오후'
털실이 곱다. 강화도 문학기행 가는 길이다. 옆자리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꽃분홍 털실 한 뭉치를 꺼낸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 여섯 가닥을 의자 손잡이에 묶는다. 딸아이 머리 땋듯 눌러가며 세 갈래로 가만가만 땋는다.
창밖 풍경에 마음 빼앗겼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땋은 길이가 한 자는 너끈하다. 매듭지어 양쪽 수술을 손으로 쓸어주더니 목에 질끈 묶는다. 허전하던 목에 생기가 돈다. 패랭이꽃처럼 경쾌하다. 이 여름에 털실 목걸이가 어색하지 않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짧은 대바늘 두 개로 뜨개질을 시작한다. 털실을 감아주고 구멍에 넣었다가 빼주기를 반복한다. 단순 반복 작업이건만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손을 놀리지 않는다.
뭘 뜨는가 했더니 목도리란다. 평소에 너무 잘 해주는 제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각자 좋아하는 색상을 미리 파악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꽃분홍 털실로 목도리 뜨는 그녀 얼굴이 성탄 전야처럼 설렘이 가득하다.
그녀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여행지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면서도 손으로는 연신 대바늘뜨기를 이어간다. 장거리 열차는 뜨개질 하기에 최적 공간이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뜨개질하면서 왔단다. 영천역에서 만난 그녀, 목에 걸린 꽃분홍 털실 목걸이가 예쁘다 했더니 오래지 않아 그 목걸이가 내게로 왔다.
뜻밖이다. 평소에 분홍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색이다. 내게도 분홍이 눈에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이십 대 중반, 혼인날을 받아 놓고 나니 세상이 온통 분홍빛이었다. 그 무렵엔 연분홍 옷을 몇 벌이나 장만했다. 아들이 태어난 이후부터 분홍이 부담스러워졌다. 게다가 꽃분홍이라니.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내게 잘 어울린다고 부추긴다. 검정 재킷과 흰 티셔츠에 포인트가 되어 산뜻하다고. 그녀의 온기가 전해져서일까. 꽃분홍 털실 목걸이가 어떤 보석보다 정감이 간다.
분홍은 레드의 열정과 에너지, 화이트의 순수함과 천진함이 섞여 부드럽고 낭만적이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포근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분홍이 진해질수록 붉은색의 행동적인 성향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여름 문학제 지신밟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행수가 꽹과리를 잡고 장구와 징이 뒤를 따랐다. 풍악이 울리자 내 안에 감춰진 불덩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신명을 어찌하지 못해 단출한 길 놀이패 꽁무니에 따라나서고 말았다. 꽃분홍 털실 목걸이 하나 둘렀을 뿐인데, 나를 춤추게 하다니.
카페에서 만난 일행들이 털실 목걸이를 탐낸다. 구석에 앉아 선명한 바닷빛 목도리를 뜨던 그녀, 못 이기는 척 털실 뭉치를 푼다. 일행 수대로 길이를 재단하여 털실을 나누어준다.
두 사람씩 짝을 짓는다. 한 사람은 털실 끝부분을 잡아주고 다른 사람은 댕기머리 땋듯이 땋는다. 서로에게 바짝 다가가지는 않는다. 적당히 떨어져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법이니까. 털실 목걸이는 촘촘하면 딱딱해 보이고 느슨하면 긴장이 없어 보인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너무 빈틈이 없으면 파고들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 풀어지면 매가리가 없어 보인다. 적당히 풀고 조여가며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예정에 없던 소소한 재미다. 즉석에서 터득한 털실 목걸이 매듭을 짓는다. 수술도 한 쪽은 짧게 다른 쪽은 조금 더 길게 해야 멋스럽다. 우리 삶도 변화를 주어야만 지루하지 않듯이. 카페에서 인증사진을 찍는다. 일곱 명이 일제히 바닷빛 털실 목걸이를 걸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털실이 일행을 하나로 묶어준다.
서라미 작가는 마음 백신으로 뜨개질을 추켜세운다. '아무튼 뜨개'에서 "나는 뜨개 덕분에 다른 사람을 숨 막히게 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뜨개가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완화하고 성취감을 높인다는 통계도 있다고.
캐나다에서는 공예 치료로 뜨개를 활용하고, 미국에서는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과 교도소에 수용된 재소자들의 사회화를 돕기 위해 뜨개를 가르친다. 임세권 교수의 남미 사진전에서도 뜨개질하는 남성이 보인다.
뜨개질엔 지름길이 없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은근과 끈기가 있어야 가능하리라. 글쓰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날마다 꾸준히 써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녀는 매일 몇 단씩 뜨다 보면 목도리 하나가 완성된다고 한다. 겉뜨기만 무한 반복해도 지루한 줄 모르는 건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힘이 아닐까.
털실은 사랑이다. 사랑은 식물과 같아 뿌린 대로 거두게 될 터이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만큼 포근한 그녀이다. 털실 뭉치가 풀려나간다. 뜨개질하는 오후, 동촌 유원지 카페엔 눈부신 바다가 출렁인다.
◆ 서미숙 주요 약력
△경북 안동 출생 △계간 '문장'(2015) 등단 △수필집 '남의 눈에 꽃이 되게' 기행수필집 '종점 기행'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프리랜서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