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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이방주 '소대(燒臺), 죽음에 대한 원형상징의 공간'

백송자 수필 '소대(燒臺)'...'수필과비평' 7월호 게재

2024-10-28     김철희 기자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토토 사이트 커뮤니티DB

문학이 삶의 양상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 그릇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내재되기 마련이다. 삶의 방식에는 죽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하여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집단무의식' 이론을 체계화한 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은  '인간의 다양한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유전적 암호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라고 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논리 이전에 원초적인 심상이나 감정의 유형을 알게 모르게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 평론가들은 이를 원형적 사유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순환이고 환생'이라는 원형적 사유를 지니고 있다. 사람은 초자연적인 영존의 세계에서 세속적인 인간의 세계로 왔다가 다시 초월적인 영속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돌아간다'라고 말한다.

백송자의 수필 '소대(燒臺)'(수필과비평 2024년 7월호 게재)는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원형적 의식을 담아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의례를 보면서 삶과 죽음에 관한 인식을 문학적 형상으로 풀어냈다.

소대(燒臺)는 불교의 죽음의례인 49재 절차 중 회향의례인 '봉송-소대의례'의 공간이다. 49재는 망자가 다음 세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머문다는 관습적 사고에서 나온 제례의식이다. 소대는 죽음으로 가는 의례의 공간이고, 망자가 다음 세계로 간 것을 확인하는 시점이디.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망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고 망자의 '이야기가 담겼다가 흩어지'는 공간이라고 했다. 연기는 사라지고 재만 남아 한줌 흙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감은 소멸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소대는 죽음은 순환과 환생이라는 원형상징의 공간의미를 갖는다.

죽음은 언제나 허망하다. 더구나 예측할 수도 없이 황황히 떠난 죽음은 남은 사람을 더욱 망연하게 한다. 부고를 받고 조문을 하면서 예를 다하는 것 같지만 그 의례적 절차는 그저 담담할 뿐이다. 남편을 이별하는 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찾지 못한다. 다만 슬픔이 '바닥을 치고 다시 선한 사람으로 살아낼 힘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조문하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망자의 유품을 태워 연기로 날려 보내고 재만 남은 소대는 다시 침묵의 공간이 된다. 수필적 자아는 이승의 삶이 재와 침묵으로 환생한 자리에 '굴뚝새'를 불러온다. 의례를 거행하는 동안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차가워지며 순환도 한다. 이렇게 소대의례를 통하여 죽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하는 초월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대와 소대의례라는 제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죽음에 대한 원형적 사유를 들여다보았다. 쉽지 않은 주제를 체험을 소환하여 평이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 이방주  주요 약력

△충북 청주 출생 △<한국수필>(1998) 수필 <창조문학>(2014) 평론 등단 △현재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사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수필집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외 6권 △수필선집 '덩굴꽃이 자유를 주네' △평론집 '해석과 상상', 수필창작이론서 '느림보의 수필 창작 강의'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대상 수상

♣소대(燒臺)-글/백송자  

연기가 갈팡질팡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고 허둥대듯 한자리에서 맴돈다. 굴뚝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습한 날도 아니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뜨거운 칠월인데 훌쩍 떠나지 않고 대지에 바짝 엎드려 서성인다. 풀지 못한 인연의 매듭이 무거워 그런가. 풀무라도 돌려 하늘로 오르는 바람길을 터주고 싶다. 훠이 훠이.

대나무 부지깽이로 잔불을 헤집는다. 미련일랑 두지 말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부디 새처럼 바람처럼 훨훨 날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거침없이 가서 편히 지내라고 주문한다. 염원이 닿았는지 한참 뒤에야 연기는 사라지고 재만 남는다. 그 재를 식힌 후 한지에 담아 소나무 아래 묻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영면하길 발원한다.

소대燒臺란 불교에서 재齋를 지내고 난 후에 망자의 옷가지, 위패 등을 소각하는 곳이다. 일반 소각장과는 다르게 평소에는 굳게 닫혀있다. 각 사찰에서는 주변을 늘 깨끗이 정돈하고 소중히 다루며 주로 명부전이나 삼성각 근처에 있다. 소대는 망자만을 위한 공간이다. 망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며 재를 지낸 그 정성으로 소각에도 예우를 다한다. 경남 산청의 대성산에 있는 정취암의 소대에는 친절한 글귀가 있다. ‘소대는 종교의식 시설물로 일반 쓰레기 소각을 금합니다.

평소에 절 경내를 둘러보다가 소대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한다. 많은 이의 이야기가 담겼다가 흩어진 곳이기에 그렇다. 소대에는 대나무로 만든 부지깽이가 늘 누군가를 기다리듯 혹은 배웅하듯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숱한 사연을 품고 버티느라 애썼을 이 작은 공간이 애틋하다.

사방이 슬픔으로 가득하다. 스님의 목탁과 염불 소리 사이로 흐느끼는 울음이 훅 들어와 쓰러지곤 한다. 제법 두툼한 방석 위로 고꾸라지는 무릎의  절규도 단단한 고요함을 절단하고 삐져나온다. 다만 사진 속의 얼굴만이 제자리를 지키며 환하다. 그는 어쩌자고 저리 해맑게 웃고 있단 말인가. 절을 올릴 때마다 그의 얼굴과 마주친다. 처자식 두고 심지어 노모까지 이곳에 남겨두고 그 먼 길 가면서 저 웃던 얼굴에 몰려왔을 상심을 생각하면 다리가 풀린다. 그녀는 틈 하나 없이 절을 하고 또 절을 한다. 그의 극락왕생만을 빌며 애통함을 삭이고 있다.

이별의 준비는커녕 인사도 없이 갑자기 떠난 그를 이해할 수 없어 그녀는 쉼 없이 절하며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 앞에서 쓰러지고 병원에 이송하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무너진 그와의 시간이 마지막이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넋을 놓았다. 사람들이 조문와서 한 마디씩 건네는 말에는 한결같이 그와의 이별이 들어 있었다. 그는 본인이 떠날 것을  알고 행한 것처럼 가까운 이와 두루두루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만 가족에게만은 아니었다.

남편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후회로 그녀는 일어서지 못했다. 아무리 지난날을 복기해 보아도 별다른 징후가 없다. 늙은 어머니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늘 든든한 울타리로 그 자리에 있는 믿음직한 아들이요 자상한 아버지였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사찰에서 초재를 시작으로 49재를 올리고 그의 옷과 위패를 소대에서 태우며 빌고 또 빌었다. 저세상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부디 잘 가시라고.

사람의 죽음에는 호상은 없다. 천수를 누렸어도 자손에게는 큰 슬픔이다. 하물며 처자식을 남겨두고 홀로 급작스레 떠나야 하는 죽음에는 기막힌 사연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 사연이 퇴색하기까지는 긴 세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금은 옅어질지는 모르나 사실은 연기처럼 사라지지는 않는다. 늘 빈 가슴을 내리치는 아픈 멍이다. 

살면서 부고를 접하는 경우가 많다. 부고는 나이듦의 지수라고도 했다. 가까운 이와의 이별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우리가 한번은 가야 하는 그 길의 문턱에 다다랐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부고에도 담담해진다. 요즘은 조문하는 실태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꼭 참석해야 했지만, 지금은 모바일 조문으로 예를 다하는 경우가 많다. 상심한 상주의 애통함을 함께 어루만져 주지 못하다 보니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생각마저 접는다. 자신을 뒤돌아봄으로써 남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주변을 배려하는 심성도 갖추지 못한다.

지아비를 잃은 그녀의 아픔을 내가 무엇으로 다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그녀 옆에서 등을 토닥토닥 해주거나 어깨를 빌려줄 뿐이다. 그러다가 쏟아내는 한풀이를 들어주고 모래알 같은 밥알이나마 한 술 뜨기를 바라며 마주앉아 밥상을 받는다. 따듯한 물 한 컵 건네주면서 손을 잡고 울기도 한다. 슬픔의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힘을 얻으면 좋겠다. 주변을 살뜰히 살피는 선한 사람으로 다시 살아내길 바란다.

소대는 다시 침묵이다. 죽은 자의 것을 보듬느라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차가운 고요함에 젖는다. 해우소 지붕에서 날아온 굴뚝새 한 쌍이 대나무 부지깽이에서 몸을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