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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0] 이경은의 독서에세이...이지운의 '시절한시(時節漢詩)'

당신의 이마 위로 가냘픈 햇살이 지나가네요

2024-12-06     김철희 기자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토토 사이트 커뮤니티DB

영문과를 나온 후배가 있는데, 해외여행만 가면 절대로 그 말을 못하게 한다. 영문과 나왔는데 영어 한 마디도 못해서 창피하다며 마구 손사래를 친다. 동감이다. 나도 중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발주머니만 들고 다니다가 겨우 졸업한 처지라, 한시(漢詩)처럼 격조 있고 고상한 분야는 잘 알지 못한다. 이런 말 못할 사정으로 그동안 그 근처는 일부러 피해 다녔다.

그러다가 이지운의 '시절한시(時節漢詩)'를 읽고 난 후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어라, 별일이 다 있군. 이제 한시 동네에 신고식을 해도 되겠는데 하는 마음이 들뿐만 아니라, 한시를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생기더니, 심지어는 공부하는 모임에 들어가 볼까 하는 욕심마저 났다. 순전히 책의 힘이다.

'한시의 초대장'을 받고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제법 들어본 이름들이 눈에 뜨인다. 두보와 이백, 소동파 같은 이름은 보니 친숙하게 느껴진다. 漢詩는 1천여 년 전부터 백여 년 전까지 중국과 한국 사람들이 한자로 쓴 시를 말한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읽을 책도 많은데 1천 년 전 시까지 읽으라고? 어려운 한자라 골치가 아플 텐데. 아니라고? 현대시보다 쉽다는 게 정말일까. 고된 삶에서 응원이 되고,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고, 품격과 우아가 베일처럼 머리 위에 얹힌다는데...'

정말 친해질 수 있을까 싶다. 사실 아직은 낯설다. 마음만 먼저 가 닿았다. 몸은 어깃장을 놓으며 질질 끌려오는 중이다. 다만 ‘시절’이란 말이 위로가 된다. 그래. '시절인연'이라는 말도 있듯이, 예전엔 몰랐어도 지금쯤은 마음에 털썩 닿을 수도 있겠지.

제일 먼저 두보의 "강변에 꽃이 흐드러지니 이를 어쩌나/ 알릴 곳 없어 그저 미칠 지경이네.”가 보이더니, 이섭의 “덧없는 인생에서 반나절만큼의 여유를 훔친 셈이네"가 눈에 들어오고, 조선시대 김시보의 “얘야, 나의 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꾸만 타고 갈 말 챙기지 말렴.”이라며 친정에 왔다가 떠나려는 딸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쓴 한시도 만져진다. 하지만 마음이 생각한다. 아직 아닌데, 더 찾아봐.

"저녁 되어 비낀 햇살이 많이 따뜻하진 않지만/ 서쪽 창에 비쳐 들면 역시나 마음 흐뭇하네"
양만리의 <고한苦寒(모진 추위)>의 한 구절이다. 마음이 찔린다. 롤랑바르트의 푼크툼을 들먹여야 할까.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비유한 이 한시에서 나는 저 '비낀 햇살'이란 말에 눈이 찔끔거린다. 한겨울의 저녁 햇살은 가냘프다. 

하지만 그 힘은 다른 계절에 비해 약하지 않다. 힘들기에 더 소중하고 절실하고, 감사하다. 가냘픈 햇살 한 줄기를 잡고 일어선다. 그 햇살이 때론 사람이다가 희망이다가, 더러는 봄 햇살을 기다리는 시간이다가 위로가 되는 따스한 말이기도 하다. 지금, 내게는 그렇다.

이 '한시 에세이' 안에는 중문학자인 작가가 비교문학을 했나싶을 정도로 타 문학에 대한 시선이 깊게 펼쳐져 있다. 생각지 못한 12월의 선물 같은 덤이다. 작가의 글을 빌린다. 미셸 투르니에가 말했다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의 ‘괄호 속의 시간’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이런 멋진 괄호를 처음 본다.

얼 그레이 밀크 티 홍차에 사이먼 앤 가펑클의 '스카보로의 추억(Scarborough Fair)'를 들으며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8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수필극 '튕' △제43회 조연현문학상(한국문협 주관),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