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수필-41] 나윤옥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오'
백현숙 수필가 '그 남자의 머리를 감겨 주고 싶다'...'수필과 비평' 12월호
며칠 전 받은 <수필과비평> 12월호에서 백현숙의 <그 남자의 머리를 감겨 주고 싶다>를 읽고는 가슴이 설렜다. 원고지 12매가 될까말까한 짧은 수필을 읽고서 든 설렘이다. 문학을 왜 쓰며 읽는가.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 아니던가. 진과 선과 미를 문학에서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느 평론가가 한 말이 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고. 그 아름다움은 다름 아니라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남자의 머리를 감겨 주고 싶다>는 병실에 입원한 한 가난한 농부에 대한 마음을 쓴 글이다. 그 남자는 벼를 수확하다가 콤바인에 손이 끼어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당했다. 시골병원에서 접합수술을 했지만 너무 늦은 탓에 곪아버려 손가락을 절단하게 되었다.
그는 항상 혼자다. ...보호자도 없고 면회 오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처치실에 다녀오고, 혼자 의사 면담하고,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
글에는 이렇게 가슴을 저미게 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다. 글을 읽으며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이유는 작가의 글솜씨 때문이 아니다. 상처 입은 한 남자의 남루한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그가 누구이든, 더구나 고독과 가난으로 움츠리고 살았을 한 남자를 어찌 그리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안에 오롯이 자기만이 자리잡고 있는 탓에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인들이다. 이 어려운 일에 문학은 넌지시 ‘방향’을 보여준다. 남을 보는 눈(眼)을 내준다.
수필 속의 그 남자는 아내를 사별하고 혼자 살아가는 외롭고 가난한 사람이다. 병원에 입원했으나 돌봐주는 이 없이 지내는 그를, 한 병실에 입원한 환우의 아내인 작가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모진 삶에 눌려있는 그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그에 감사함을 느끼는 그 남자. 남자는 자신의 운동화 끈을 메어주는 작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걷어 올려주는데, 그때 작가는 그의 머리를 감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타인의 손이라면 소스라치게 내치는 일반적인 모습과 다른 이 장면은 얼마나 뭉클하던지.
문학을 통해 희망을 갖는다. 좀더 좋은 사람 좋은 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문학이 가야할 길이 이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시선 안쪽에 깊숙이 깃든 인생관은 꽤나 견고해 보인다.
작가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고맙소. 당신은 아름다운 작가입니다.
◆나윤옥 주요 약력
△강원도 춘천 출생 △'한국수필' 수필 등단(2005) △'인간과문학' 평론 등단(2020) △평론집 '작은 눈으로 읽는 서사 수필' 출간(2024)
♣'그 남자의 머리를 감겨주고 싶다'-글/백현숙
삐쩍 마른 남자가 창밖을 내다본다. 일흔 초반의 나이인데, 굵고 깊은 주름으로 인해 팔십 넘은 노인 같다. 붕대를 감은 오른손은 가슴 앞에 얌전히 매달려 있고, 왼손은 링거대를 잡고 있다. 붕대를 얼마나 두껍게 감았는지 복싱 글러브 같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더니 노랗게 웃으며 알은체를 한다. 다행이다. 어젯밤에는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가슴을 졸였다.
금식이라 점심도 굶고 바로 수술실에 들어간 남자는 창밖에 어둑살이 깔리고서야 병실로 실려 왔다. 수술 통증이 심하고, 무엇보다 나올 듯 나오지 않는 소변 때문에 고통이 심한 듯했다. 남자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진통제를 맞고 소변줄을 끼우고서야 진정되었다.
벼를 수확하다가 콤바인에 손이 끼었단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시골 병원을 거쳐 구급차를 타고 이 병원으로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접합 수술을 했지만, 이미 상해버린 손가락은 곪아버렸다. 다시 손가락 절단 수술을 했다.
그는 항상 혼자다. "집사람은 벌써 저세상으로 갔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했다. 아들이 한 명 있다고만 했다. 보호자도 없고 면회 오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처치실에 다녀오고, 혼자 의사 면담하고,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
그는 잠이 없다.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삐걱거리는 침대소리가 들린다. 뒤척이며 내뱉는 한숨 소리가 무겁고도 아득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바스락거리며 짐을 정리한다. 그러다 물건을 떨어뜨려 사람들의 단잠을 깨운다. 여기저기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도 개의치 않는다. 수면제를 처방받아 먹었지만, 약발이 듣지 않았다. 한밤중에도 병실 밖에 나가 돌아다닌다. 복도를 배회하다 병원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옥상에 올라가기도 한다.
그는 내내 춥다고 한다. 환자복 안에 티셔츠를 입고 또 위에는 파카를 걸치고도 여기는 왜 이리 춥냐고 투덜댄다. 땟자국으로 뺀질뺀질한 파카에서 쓸쓸한 남자 냄새가 났다. 어찌 기름기 없는 그의 마른 몸 탓일까. 마음이 추운 거겠지. 혼자 하는 여행이 얼마나 외로울까.
한 중년 신사가 찾아왔다. 이 병실에 입원했다가 얼마 전 퇴원한 사람이란다. 운동화 한 켤레 들고 왔다. 나중에 퇴원할 때 장화 신고 어떻게 가겠냐며 새 신발은 아니지만 갖다 주러 온 것이다. 이 남자가 입원할 때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논에서 일하다 다쳐 그대로 병원에 왔으니 아마 장화를 신고왔나 보다. 봐라. 세상은 혼자가 아니다. 내 가슴이 손뼉을 친다. 얼추 맞을 거라고 했지만, 발에 꽉 끼이는 듯했다. 내가 운동화 끈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괜찮냐고 올려다보며 묻는데 내 얼굴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때 나는 막 머리를 감아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내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걷어 올려 주었다.
무심한 그의 손길을 느끼는 순간, 나는 이 남자의 머리를 감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헝클어지고 엉겨붙어 있는 그의 머리를 감겨주면, 그가 환하게 웃을 것 같았다. 우수수 살비듬 떨어져 있는 그의 침대를 지나치면서, 웅크리고 설핏 잠든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등을 쓸어주고 싶기도 했다. 쪼그라들고 구부정한 등에서 이제는 생의 뒤안길에 접어든 남자들의 고독함이 보인다. 곧 버려질, 낡고 발가벗겨진 마네킹 같은 서러움이 묻어난다. 이 남자에게서, 내 남편에게서, 그대의 남자에게서.
나는 이 남자가 웃거나 실없는 농담을 할 때면 따라 웃어도 가슴이 저렸다. 그날, 수술을 끝내고 와서 포효하듯 울부짖던 이 남자는 마음이 몹시 아픈 사람이다. 용케 잘 버티다 울음이 터진 것 같다. 한 번 실컷 울어보고 싶지 않았을까? 아비는 없다고 생각하라며 내친 아들을 부르는 소리였을까.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고, 죽지 못해 살아온 삶이 서러웠다고 아르렁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남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다시는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마라, 손가락 하나 없어 불편하겠지만 까짓것 칠십 평생 살아온 오기로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잠 푹 자고 나면 이 고비도 물러갈 거라고 말해 주고 싶다. 지나온 삶에 대한 무지, 반성, 후회 다 소용없는 짓이다. 남은 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더 이상 그의 삶이 춥지 않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퇴원하던 날, 그가 승강기 앞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다시는 우연으로라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인데, 자꾸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