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 4색 문화 에세이-25] 전수림 수필가 '실개천의 봄맛 같은 시인의 술 두보주(杜甫酒)'
시장이 멀어서 저녁상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채 가난한 집에 있는 묵은 술만 꺼내 손님께 권한다. -두보 객지(客地)-
중국 쓰촨성에서였습니다. 이십여 일 아파트를 임대해 지냈는데, 아침마다 인민공원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지요. 문화가 생소하니 어디다 눈을 두어도 좋은 곳들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많은 고전으로 흥미로운 도시였으니까요.
특히, 쓰촨은 두보의 시처럼 아무리 가난해도 집에 술이 떨어질 것 같지 않은 뒷골목의 풍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이천년이 넘은 역사적인 학교도 볼 수 있고, 문 앞에 나와 뜨개질하거나, 재봉틀을 돌리거나 춤과 체조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며칠 뒤였어요. 또 다른 길목을 설렁거리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주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나 오래됐음이라는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은 정감 가는 2층 목조건물이었어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화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곳이지요. 생경한 분위기가 좀 어색했지만, 오히려 낯설어서 어찌나 좋던지요.
내부 2층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이상하게 무엇에게 홀리는 듯한 묘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난간 테이블에 앉으면 아래층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에요. 마치 취권에 나오는 검객이 난간을 뛰어넘어 공중을 휘돌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흥미로운 주점이었어요.
여행지에서 주점에 가는 일은 마음을 열어 놓는 일입니다. 낯선 곳에서 술집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는 좋은 위로라 생각합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 섞이는 것으로 설렘이 극에 달하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일행 중 중국어 4급 자격증을 딴 사람만 믿고 덜컹 떠나온 터라, 말이 짧아 소통도 어려워 일단 술병이 예쁘장한 것으로 골랐습니다. 과일 향을 품은 달콤한 고량주였습니다. 작은 잔에 가득 따라 냄새부터 맡고, 혀끝으로 맛을 보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한 모금 꿀꺽 삼키니, 목구멍이 감전되듯 찌릿하게 훑고 내려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원래 목적은 동행인 두 사람과 뒷골목을 휘젓고 다니며, 사천 음식에 대한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거였는데, 그 일은 뒷전이었고 낯선 것에 적응하기에 바빴습니다. 사실 단기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을까만은 최선을 다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쓰촨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두보초당(杜甫草堂)에서 두보주를 만난 일입니다. 시인의 이름이 붙은 술이니 더 정감 가고, 문인들에게 맞춤 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주 오래 묵은 술로 마치 그의 숨결이 깃든 듯했으니까요.
두보(712~770년)는 이백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입지요. 평생을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에 시달리다 삶의 일부를 두보초당에서 보냈습니다. 널따란 부지에 연못과 대숲, 아치형의 문을 넘나들며 수많은 화분으로 꾸며진 정원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두보를 기리는 사당이자 박물관으로, 두보의 시집과 다수의 서적 및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정원을 산책하다 보면 어디선가 두보가 술병을 들고 불쑥 나타날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쓰촨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두보에게 세속을 초월해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 하여 '주선(酒仙)'이란 별칭을 붙여줬답니다. 그의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지만, 그나마 지인들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9년여 세월을 비교적 유유자적한 날을 보내며 200편이 넘는 시를 지었답니다.
초당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면 그의 동상을 만나게 되는데,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입니다. 나도 살아있는 사람 대하듯 손을 내밀어 안위를 물었습니다. 통했을까요. 아련한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찌릿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대하는 내 마음이 전해진 것인지도 모르지요. 시인을 만난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두보는 시 뿐 아니라 직접 술을 빚기도 하였지요. '조우(朝雨)'란 시에서는 '초당에 아직 술이 남아 있어서 요행 싱그러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네' 하고 자족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두보주는 수수, 밀, 찹쌀, 옥수수 등을 원료로 전통적인 공법으로 술을 빚는다네요. 나는 수북이 쌓인 두보주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두보를 바라보듯이요.
좋은 술은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릅니다. 집에 돌아와 글지이들에게 내놓으니 역시 시인의 술이었습니다. 누구는 옹달샘 맛이라고, 누구는 얼큰하게 취하기 좋은 술이라고 하네요. 아, 제 입맛에는요. 먼 곳에서 달려온 친구에게 소중한 것을 내놓는 맛이랄까. 너무 추상적인가요. 아니, 사철 푸른 대나무처럼 곧고 맑은 맛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겨우내 얼었던 냇물이 졸졸거리는 실개천의 봄맛 같기도 하고요.
두보주는 그런저런 여러 가지 맛을 느끼게 합니다. 나는 어떻게든 두보의 시심을 담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술병이 비워질 때쯤, 귓속에서 걸쭉한 두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술 없으면 맹숭맹숭해서 무슨 맛으로 살지?"
◆전수림 주요 약력
△강원 양양 출생 △ '예술세계' 등단(2001)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리더스에세이 편집주간 △제6회 전영택문학상. 제31회 한국수필문학상. 제1회 리더스에세이 여행작가상. 제4회 인산기행수필 문학상 △수필집 '비 오는 날 세차하는 여자' '아직도 거부할 수 없는 남자' '엄마를 사고 싶다' '떠남' '서쪽에 걸린 풍경' '떠남Ⅱ'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