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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3] 이경은의 독서에세이...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히다

2024-12-28     김철희 기자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토토 사이트 커뮤니티DB

랭보, 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순간 마음이 아련해진다. 괜히 설레고 이상하게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다. 이건 어디에서 오는 기류인가. 괴물 같은 영혼, 지독한 방랑벽, 독설, 광기, 치명적 동성애, 다리 절단으로 온 죽음, 상식을 벗어난 시인, 천재 그 자체인 천재... 이런 말에서 오는 마력인가. 아니 말이 모자란다. 랭보는 이미 랭보라는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아린 시인이다.

내게 '지옥'이란 말은 단테의 <신곡>을 의미한다. 라틴어가 아닌 피렌체 민중언어인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썼고, 총 1만 4233행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다가, 1300년 봄에 35살의 단테가 부활절을 전후하여 일주일 간 '지옥부터 천국까지 저승을 여행하는 책'이다. 그 중 지옥편이 인기가 좋은 건 두려우면서도 궁금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 보면 느닷없이 이태리어를 배운 것도 이 책을 읽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 때문이었지만, 원문을 보는 순간 단칼에 깨졌다. 허황된 꿈. 언어가 어마어마했다. 배워보겠다는 열정도 좋지만, 때론 사람이 할 것 못할 것을 가릴 줄도 알아야한다. 완전히 깨져야만 비로소 알아지는 교훈은 지겹지만 우리 삶의 기둥은 된다.

랭보는 하필 왜 '지옥'을 책의 제목으로 골랐을까. 그가 자기 손으로 출판한 단 한 권의 책이며 유일한 완성본이자, 유명 시인 폴 베를렌과의 '이상한 동성 부부' 관계가 파탄이 난 후인 1873년 여름에 쓰여 진, 열아홉의 기록인데... 이런, 19살이라니!

투시자가 되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마약과 술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방탕에 몸을 바친 천재이자 광기의 시인. 그에게 단번에 빠진 베를렌은 55도의 압생트를 '시인의 세 번째 눈'이라면서, 랭보와 함께 즐겨 마셨다. 각설탕을 전용스푼에 올리고 아주 천천히 물이나 압생트를 떨어뜨리면, 순간 희뿌연 연기에서 에메랄드빛의 그린 색으로 바뀐다는 술. 만약 녹슬어 버린 영감이 되살아나기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자기의 글이 미래의 근원이 되길 바라던 랭보가 어찌 이 술을 마시지 않으랴.

피카소부터 고흐, 고갱, 마네, 로트렉까지 사랑했다는 마법 같은 압생트 한 잔을 마시고 싶은 밤이다. 랭보의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라는 글귀를 안고서, 나도 퇴폐 속으로 달려가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다. 베를렌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 시기인데 지옥이라고? 비록 총기 사건으로 비극적인 결별을 맞지만, 그렇다고 지옥으로까지 그릴 거야 뭐 있을까. 아니 한 가정의 평범한 삶을 파괴하고 얻은 사랑은 이미 예고된 지옥의 길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 속으로 걸어들어 간 걸까.

랭보는 뜨겁게 사랑을 했지만, 그 달콤하고 치명적인 위험을 눈치 챈 것 같다. 어쩌면 런던에서 2년을 베를렌과 지내면서 행복보다는 지옥을 더 경험했는지도... 돈은 떨어져가고, 유부남인 남자와의 동거는 늘 불안과 고통이 뒤따르니 '지옥'이 곁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 영화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에서 배우 디카프리오의 랭보 연기가 쩍 달라붙었다.

<신곡> 제3곡에 나오는 '지옥의 문' 꼭대기에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라는 말이 있다. 랭보는 이미 알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의 사랑이 희망을 잃게 될 거라는 걸.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랭보의 머리 위로 올바른 길을 안내할 '별 stelle'이 저 하늘 위에 반짝였는데.  
그대, 스치고 지나갔던가. 세상에 눈을 감고 바람처럼 사라지다니.

압생트 한 잔과 영국 록밴드 캔서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 Dust in the Wind’를 들으며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8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수필극 '튕' △제43회 조연현문학상(한국문협 주관),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