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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우리는 기억한다… 그날 역사의 무대 위에 섰던 그들을

'노찾사' 6월 항쟁 20주년 기념 콘서트
'1987, 그 20년 후에'… 그날의 뜨거웠던 열정과 감동 되새기는 무대

2007-06-05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용광로처럼 펄펄 끓었던 그 시절 민중가요는 감동의 노래였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손을 맞잡고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목놓아 불렀다.

변혁의 열기가 식은 지금, 그 노래 주인공들과 강렬했던 노래들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의미로 채색되어 있고 그 생명력은 앞으로도 유효한 것일까.

지난 5월 26일 서울 대학로. 87년 당시 시위대와 전투경찰의 대치했던 그 뜨거웠던 거리엔 ‘대학로 문화축제’가 한창이다. 그날의 함성을 뒤로하고 도로 한복판 무대 위에는 신나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처럼 대학로를 찾은 이유는 민중가요의 리더 격인 노찾사가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에서 3일 동안 ‘1987, 그 20년 후에’ 콘서트로 6월 항쟁 2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었기 때문이다.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 역사의 현장이,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그 뜨거웠던 열정이 그들의 노래로 인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갔다.

혹 세월에 밀려나 그 노래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있을지라도 아직 이렇게 우리가 기억하고 있노라고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2년 전에도 노찾사는 기념 공연을 했다. 그때 호평과 더불어 7080음악 부활과 맞물려 일개 ‘추억’으로 전락하는 분위기에 많은 이들이 우려감을 표명했다. 민중가요도 추억의 노래로 박제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음악적 지향점을 찾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릴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번 공연은 ‘6월 항쟁 20주년 기념’이라는 명분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무대였다. 객석을 꽉 채운 관객층은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다. 어린 자녀세대를 데리고 온 관객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음악도 투박함과는 거리가 먼 프로다운 깔끔한 사운드를 구사했다. ‘젊은 그대’, ‘ 나의 바램은’, ‘21세기가 되면 우리는 어디로 갈까’, ‘정원’ 등 신곡들엔 지금 우리 사회의 고민이 느껴졌다.

한 멤버는 “비장한 정서만으로 공감을 얻는 시대가 아니기에 음악 완성도에 많은 신경을 썼다. 멤버들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간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완숙해졌다. ‘노래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은 지금도 똑같다”고 말했다.

공연 후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80년대 운동권 대학생이었던 허미자(46) 씨는 “그 시절 가슴 뭉클했던 추억의 노래들을 듣고 싶었는데 대부분 새로운 노래만 불러 섭섭했다”고 아쉬워했고 30대 학원강사 심규현 씨는 “옛날 노래로 일관된 지난 번 공연보다 새로운 창작곡을 많이 선보인 이번 공연이 훨씬 좋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처럼 양극적인 반응처럼 80년대를 몸으로 겪은 세대의 추억 공감대를 만족시키면서 새로운 음악 지향점을 이뤄내야 하는 노찾사의 현실과 미래는 결코 평탄치 않게 느껴졌다.

이에 대해 한동헌 대표는 “활동을 재개할 때도 잘 보존되고 있는 노찾사를 들춰내지 말자는 의견과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고민하고 따뜻하게 만들 ‘노래를 찾는’ 작업은 사람들의 노스탤지어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찾사는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은 9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이 주춤했다. 한 대표는 “노찾사가 요즘 음악시장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심하게 말해 향수나 노스탤지어에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80년대의 시대적 소망을 노래에 담았듯, 현재 삶의 모습과 아픔을 노래하는 음악은 필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 인터넷 유저는 "티켓 값이 비싸 보러가는 걸 포기했다. 보다 열린 공간에서 보다 싼 입장료로 보다 많은 대중과 한바탕 공연을 펼치는 것이 의미 있지 않았을까"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부가세 포함 4만4,000원.

다른 콘서트 가격에 비교하면 비싸지는 않지만 관객들의 불만은 예상하지 못한 난관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노찾사 관계자는 "대관료, 제작비, 조명이나 음향 등 설비비를 빼고 나면, 공연 기간 모든 좌석을 판매해도 적자다.

노찾사 동문들에게도 초대권을 못 드리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노찾사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듯 관객들의 인식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1987년은 노찾사에게도 특별한 해였다. 84년 데뷔음반을 낸 노찾사는 3년 후인 87년 10월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처음으로 합법적 공연을 열었기 때문. 지금이라면 대중음악사에 기록될 중요한 그 공연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관련 자료 일체를 보존했겠지만, 필자는 그 당시 수많은 시위현장 중에서 가장 한가한 현장이라고 오해했다.

음악 마니아였던지라 무차별로 쏟아졌던 선동적인 민중가요를 매일 듣는 상황이 솔직히 짜증스럽기도 했다. 헌데 그날 들은 노찾사의 노래는 달랐다. 찡한 전율을 느꼈다. 그곳에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이 있었지만 그땐 그들이 누군지도 몰랐다.

노찾사는 일대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사계’는 주류 대중가요 차트에 오르며 민중가요가 주류가요계를 점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한동헌 대표는 “87년 10월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노찾사 첫 공연을 열었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당시 민주화 운동 덕분에 노찾사의 노래가 힘을 얻었기에 그때의 시대정신을 돌아보는 무대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멤버 송숙환 씨는 “그땐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무사히 공연을 끝낼 수 있을까, 연행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박수를 받았는지…. 모두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하지만 잘나가던 시절에도 노찾사는 경계에 걸쳤던 정체성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운동 진영도 가요계도 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그 누구와도 차별되는 음악적 실험을 선보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노찾사의 미래는 장밋빛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적이지도 않다. 최근 신세대 가수들인 댄스그룹 거북이가 ‘사계’를, 래퍼 MC스나이퍼가 ‘솔아 푸르른 솔아’를 리메이크해 10대들도 노찾사의 노래를 안다.

다만 암울했던 군사독재에 맞서 80년대에 각 계층을 연결시켰던 노찾사의 아름다운 노래들은 이제 다시 한번 그런 치열한 역할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듯 ‘대학생 10명 중 6명은 6·10항쟁을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그 시절의 노래를 보존하고 희망을 담아내는 노찾사의 외로운 노래 작업은 더욱 필요로 할는지 모른다. 노찾사의 노래 찾기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정신을 되살리는 흔치 않은 통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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