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숙이며 野에 손 내민 尹대통령…협치·소통에 물꼬 트일까
與보다 野 앞세운 尹, 시정연설서 이재명부터 호명 예산안 처리 협조 요청…"위기극복에 힘 모아 달라" 신사협정 첫 시험대…野 피켓 시위로 취지 무색해져
[토토 사이트 커뮤니티 박준영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후 세 번째 국회 시정연설 분위기가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1년 전 텅 비어 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자리는 채워졌다. 윤 대통령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과 악수했고, 시정연설에서도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먼저 호명하는 등 국회의 초당적인 협력을 거듭 당부했다.
회의장 안에서 피켓시위나 고성·야유를 자제하자는 '신사협정'에 따라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여당은 윤 대통령이 퇴장할 때까지 30여 차례 박수를 치며 호응했지만, 야당은 침묵을 유지했다. 국회 본회의장 밖에서는 '국민을 두려워하라', '민생이 우선이다', '국정기조 전환' 등의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신사협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기도 했다.
◇ 몸 낮춘 대통령, 민주당부터 찾아가 악수하고 협력 당부
2024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 나선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쯤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섰다. 국회 시정연설은 정부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며 대통령이 직접 정부의 주요 정책이나 국정 전반에 관한 생각을 밝히는 자리다. 관례적으로 국회의원 모두가 일어나 대통령을 맞고, 대통령은 여야 의원들과 악수하며 입장한다.
이날 윤 대통령은 가장 먼저 민주당 의원들이 포진해 있는 곳을 찾아 이 대표 등과 악수했다. 조정식, 김민석, 김교흥 등 민주당 의원들과도 인사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야당 의원들이 악수를 청하는 윤 대통령을 쳐다보지 않거나 마지못해 악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민의힘 의석 쪽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도 국회의장단에 이어 이 대표를 먼저 호명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이름은 이정미 정의당 대표에 이어 맨 나중에 불렸다. 민주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한 만큼, 여당보다 야당을 앞세우면서 내년도 예산안 처리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윤 대통령은 이날 시정연설에서 '협조'를 5번, '부탁'을 5번, '관심'을 4번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금융, 세제지원을 통한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의 초격차 확보를 위해 힘써왔다고 밝히면서 "그 과정에서 보여준 국회의 관심과 협조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3대 개혁(연금·노동·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특히 연금개혁에 대해선 "국회가 초당적 논의를 통해 연금개혁 방안을 법률로 확정할 때까지 적극 참여하고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교육개혁과 관련해선 "교권 보호 4법의 개정에 협조해 주신 국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를 재확인하면서 민생 경제 활성화 법안에 대한 관심과 협조를 촉구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마련한 예산안이 차질 없이 집행돼 민생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도록 국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며 "170만명 기초수급자의 생계급여와 100만명 대학생과 청년의 국가장학금이 제대로 집행될 수 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674조 원의 민간 투자를 끌어낼 국가 재정 인프라 예산이 적기에 집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란다"며 "지금 우리가 처한 글로벌 경제 불안과 안보 위협은 우리에게 거국적, 초당적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 당면한 복합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이 끝난 뒤 진행된 상임위원장단 오찬에서도 "여야 의원 모든 분께 감사드리고, 여러분이 아까 간담회 때 하신 말씀은 제가 다 기억했다가 최대한 국정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시정연설에 앞서 진행된 5부 요인, 여야 지도부와 사전 환담에서는 "어려운 민생을 해결하고 또 신속하게 교체할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국회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 여야, 엇갈린 평가…與 "오로지 민생" vs 野 "맹탕연설"
여야의 평가는 이번에도 갈렸다. 국민의힘에선 민생경제에 방점을 찍었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민주당 등 야당에서는 '맹탕 연설'이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김 대표는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불필요한 예산의 낭비를 줄이고 그 재원을 잘 활용해서 약자 복지를 더 촘촘하고 더 두텁게 하겠다는 것이 (시정연설에서) 아주 분야별로 잘 드러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내년도 예산안은 나라 살림 정상화를 위한 '건전 예산'이자, 약자에 대한 보호는 더욱 두텁게 하는 '친서민 예산'"이라면서 "불요불급하거나 부정 지출을 꼼꼼히 찾아 이를 조정하고, 이렇게 마련된 재원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미래 성장 동력확보, 일자리 창출 등에 더욱 집중해 ‘민생경제’에 방점을 찍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달리 윤영덕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당면한 경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국민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공감, 실질적인 대안을 찾아볼 수 없는 한마디로 '맹탕 연설'이었다"며 "민주당은 예산안 심사에서 윤 정부가 지워버린 예산을 복원하고 국민의 희망을 되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희서 정의당 수석대변인도 "민생 실패, 국정 운영 실패에 대한 반성과 쇄신없이 실패를 반복하겠다는 아집투성이 연설이었다"며 "정의당은 국민과 함께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바로잡는 예산 정상화, 국가 정상화를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野 피켓시위에 빛바랜 '신사협정'
한편 이날 윤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여야가 지난 24일 맺은 '신사협정'의 시험대 성격을 띄었다. 이 협정은 본회의장에선 잘 지켜졌다. 하지만 야당은 윤 대통령이 본회의장으로 입장하는 시간에 맞춰 국회 로텐더홀 계단 앞에서 피켓을 든 채 침묵 시위를 벌였다. 본회의장에서 진행되지 않았던 만큼, 신사협정을 어기지 않았다는 게 민주당의 입장이다. 윤영덕 원내대변인은 “회의장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사협정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위를 벌이던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눈길을 주지 않고 지나치는 윤 대통령을 향해 "여기 좀 한번 보고 가시라"며 고성을 지르고, 강성희 진보당 의원은 시정연설 내내 윤 대통령의 탄핵을 시사하는 피켓 시위에 나서면서 신사협정이 '반쪽'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