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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수필 공간] 서미숙 '그늘진 훈장'

2024-04-14     김철희 기자
서미숙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토토 사이트 커뮤니티 DB

책 표지가 산뜻하다. 초록 바탕에 빨간 집, 인공기가 걸린 집, 자전거에 인공기 깃발을 꽂고 신념대로 삶의 페달을 힘껏 밟는 빨치산 아버지 모습을 담았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루었지만, 이념에 치우치지 않아 접근하기에 부담이 없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목숨을 건 사람들,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선택한 혁명가 집안 이야기 속으로 단숨에 빨려들었다. 가지 않은 길이기에 더 솔깃한지도 모른다. 거침없이 구수한 입담과 읽을수록 착착 감기는 전라도 사투리가 읽는 맛을 더한다. 

이 책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는 사흘간 이야기다. 유일한 혈육인 딸은 빈소를 지키며 아버지와 얽힌 다양한 인간관계를 마주한다. 눈물을 찍어내며 되새기는 가족 이야기는 우리네 민낯을 보는 듯하다. 

딸은 낯선 조문객을 통해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고인을 추억하는 빈소 풍경이 훈훈하다. 피를 나눈 동기간은 물론이요,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동지애는 각별하다. 저마다 인연 따라 찾아온 문상객들은 내 일처럼 장례를 도와주며 인정을 베푼다.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노랑머리 여자아이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이야기가 감동이다. 여든 넘은 할배가 담배 친구라는 당돌한 아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담배 피워도 먼 산 보며 외면하는 어른이 대부분이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 할배였다고, 그 아이는 아비가 휘두르는 폭력에 베트남 엄마와 도망 다니는 처지다. 

문제 아이에겐 문제 부모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 아이가 할배 덕분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시험에 붙으면 술을 사주겠노라.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며 모녀가 빈소를 찾았다. 합격 술은 자기가 사겠다며 아이를 위로하는 딸 고아리 모습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아버지 고상욱은 <새 농민>이 시키는 대로 농사짓는 문자 농사꾼이다. 뼛속까지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다. 그는 고 씨 집안의 자랑인 동시에 몰락의 원흉이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라는 대목에서 콧날이 시큰해진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공적이고 논리적이며 정치적인 말만 하는 근엄한 혁명가였다. 그 집 분위기가 언제나 훈시적이고 엄숙했던 어릴 적 우리 집과 비슷하다.

읽는 내내 교사이자 주말 농부였던 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병마로 할아버지가 세상을 버릴 때 아버지 나이 서른하나였다. 객지에서 근무하다가 장손이기에 고향으로 전근했다. 아버지 또한 <새 농민>을 구독하며 과수 재배를 시작했다. 상일꾼 역할을 했던 엄마와 머슴들 덕에 논밭은 그럭저럭 지켰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당시 우리는 사대가 한 집에 살았다. 증조부모와 할머니, 아버지 칠 형제와 우리 오 남매까지 감당하느라 당신 어깨는 늘 무거웠으리라. 증조할아버지께 '출필곡 반필면'을 실천했다. 귀향해서는 어른들 틈에서 당신 아이들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늘 체통을 지켰다. 

고상욱은 봉건주의 희생양이 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어른들이 정해준 국졸 부인에게서 도망쳤다. 빨치산 동지였던 여인과 재혼해서 딸 하나를 낳았다. 장례식장에는 전처 가족, 전 시동생 가족이 조문을 오기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어쩌면 그는 봉건주의와 헤어질 결심을 한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 장면에서도 우리 아버지 생각이 절로 났다. 

아버지 또한 가문을 보고 맺어준 국졸 엄마와 혼인했다. 인물이 반듯하고 훤칠했던 아버지 기대에 차지 않아서일까. 젊은 시절 아버지는 잠시 방황했던 모양이다. 같은 학교 참한 여선생에게 마음이 쏠렸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집안 장손으로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늘그막에 아버지는 지난날을 회고하며 농담처럼 털어놓았다. "그때 그 여선생하고 도망 가부랬어야 하는데... 내가 늘 바른생활 표본으로 여겼던 아버지도 남자였다는 걸 인식한 순간이었다.

고아리는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빨치산의 딸이라는 이유로 8년간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 전날 헤어져야 했다. 연좌제로 인해 피해를 본 가족사는 우리 현대사의 씁쓸한 단면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아픔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세상 모든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내 사정이, 형제간에 평생 원수로 지내야 했던 소설 속 작은아버지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나" 그 한마디면 족한 것을. 

죽음 앞에서는 용서되지 않는 죄가 없는가 보다. 마침내 화장터에서 작은아버지는 철천지원수로 지낸 형의 유골을 안으며 화해한다. 냉정한 합리주의자였던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딸은 자신과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의 흔적마다 유골을 뿌리며 고통에서 해방시킨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 어깨에 두 짐 지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를 위한 헌사이다. 문체가 냉소적이면서 가볍게 눙치는 게 작가의 매력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자 부모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 고상욱과 고아리, 노랑머리 여자아이도, 꿈속에 다녀간 내 아버지도, 그리고 내 안에도 내가 모르는 무수한 얼굴이 있을지 모른다. 내 장례식에는 누가 와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나처럼 음치였던 내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립다.

◆ 서미숙 주요 약력

△경북 안동 출생 △계간 '문장'(2015) 등단 △수필집 '남의 눈에 꽃이 되게' 기행수필집 '종점 기행'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프리랜서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