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급발진...볼보 판결문엔 '소비자 증명책임 완화 필요'
21대 국회에 법 개정안 5건 계류 중
[토토 사이트 커뮤니티 박철응·안효문 기자]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을 주장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행 법에서는 소비자가 제조사의 결함 책임을 입증토록 하고 있어 법적 원인 규명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관련 사건 재판부도 소비자 증명 책임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지난 7일 경기 수원시의 한 주택가 도로에서 60대 운전자가 몰던 SUV 외제 차량이 보행자 도로로 돌진해 50대 여성을 숨지게 했다. 이 차량은 사고 후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근처 전신주에 충돌하고 나서야 멈췄고, 운전자는 급발진 사고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달에는 서울 여의도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중 주차된 벤츠 차량을 경비원이 대신 옮기려다 주차된 차량 12대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경비원과 차주는 급발진을 주장하며 벤츠 본사와 벤츠코리아 등을 상대로 수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로 했다.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생명, 신체 또는 재산에 손해를 입은 자에게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제조사의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결함을 밝히기 지극히 어렵다는 점을 반영해 2017년에 법이 개정됐다.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 '제조업자의 실질적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 초래' '결함 없이는 통상 발생치 않는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증명하면 결함으로 인한 손해로 추정하는 조항이 신설된 것이다.
급발진 사건에 대한 최근 판결은 볼보 S60 T5 사고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최규연 부장판사)가 지난달 내놨다. 2020년 10월 경기 판교 한 아파트 상가 건물 앞 도로에서 갑자기 출발해 최대 시속 120km가 넘는 속도로 500m가량 운행하다 청소년수련관 내부로 들어가 국기게양대와 충돌해 전치 20주의 상해를 입은 사고였다.
전자제어장치 ECU 결함으로 주차(P) 모드로 정지된 상태에서 갑자기 급발진했다는 등 주장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했다.
하지만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사고 발생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비정상적 주행'을 전제로 급발진 여부가 문제되는 것이어서 소비자가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면서 "그 중에는 실제 급발진이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움에도, 우리나라에서 급발진으로 제조자에게 책임을 인정하는 종국적인 판단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급발진 의심 사고에서 제조물책임을 묻기 위한 소비자의 증명책임을 좀 더 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반대로 사고 발생 사실만으로 결함을 추정하거나 '결함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 증명을 제조업자가 해야 한다고 볼 수도 없다는 점을 짚었다. 제조업자 책임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다.
따라서 소비자 증명 요건은 '일반인의 상식과 경험 등에 비추어 사고의 양상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후 소비자 측 요인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 간접사실들로 증명하면 결함으로 추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소비자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 환경적 요인, 운전경력과 습관, 차량 개조 여부, 사고 회피를 위한 노력 여부 등을 '간접사실'의 예시로 들었다.
제조업자에게는 차량 결함과 무관하게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하면 그 추정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보는 등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회에는 급발진 의심 사고 시 소비자의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내용의 법안들이 5건이나 계류돼 있다. 하지만 21대 국회가 이달 말 종료될 때까지 다뤄지지 않으면 모두 폐기되고, 다음 국회에서 다시 발의돼야 논의할 수 있다.
관련 법안을 발의한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6일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국회가 책임감을 갖고 빠른 시일 내에 심사 및 통과시켜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허 의원은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이도현(당시 12세)군이 숨진 급발진 의심 사고를 언급하면서 "운전자인 할머님은 검찰의 결정으로 다시 수사를 받으셔야 한다. 아버님은 내내 재판 준비에, 수천만원의 비용을 직접 감당하면서까지 사고 현장 주행 재연 시험 감정도 진행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제조물 책임법이 소비자의 입증 책임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개정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자비를 들여 단독으로, 그것도 자본과 제조물 관련 정보에서 절대적 우위에 선 제조사에 맞서야 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