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박미경 수필가 '그 푸르른 날들을 위한 송가'
어쩌면, 상처였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주택이 시차를 두고 변해 버린 것은.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과 빌라로 이루어진 다정한 동네를 사랑했다. 큰길을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 때면 나의 시선은 예외 없이 담쟁이 붉은 벽돌집에 머물렀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를 떠올리게 하는 집. 창문과 현관문을 제외한 3층 벽돌 주택이 온통 담쟁이로 덮힌 풍경은 유럽의 오래된 성 같은 운치를 자아냈다. 봄과 여름에는 싱싱한 초록 잎이 찬란히 빛났고 단풍으로 물든 담쟁이 잎이 현란하게 타오르는 계절이면 그 집안의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었다. 고독하게 떨어진 잎 사이로 실핏줄처럼 얽힌 겨울 담쟁이 줄기들의 생명력을 보며 위로와 감탄으로 함께 한 날들이 십수 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담쟁이 잎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단 하나의 이파리도, 줄기도, 뿌리도 남김없이 제거되고 맨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벽돌집을 바라보던 순간의 참담함이라니. 알 수 없는 분노와 모욕감, 억울하기까지 한 감정들 때문에 눈물이 났다. 허전하고 우울했다. 짝사랑하던 남자가 삭발하고 나타났을 때의 충격이 이럴까. 그 길을 애써 외면하고 다녔다.
초여름에서 가을 문턱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던 또 하나의 집.
5층 노란색 빌라의 벽면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가던 능소화는 완벽한 한 점의 벽화였다. 수퍼마켓을 갈 때마다 주황빛 등을 달고 타오르는 화려한 꽃 벽화를 보기 위해 돌아가는 길 또한 얼마나 행복했던가. 마치 동화 '잭과 콩나무'처럼 한없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능소화를 바라볼 때의 고요하던 황홀감. 꽃들과의 교감을 즐기던 그 빌라의 능소화마저 하루아침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날, 가슴이 텅 비어버린 듯한 상실감은 아직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듣기로는 담쟁이나 능소화의 넝쿨이 너무 강해 건물의 수명을 단축시킬 위험성이 있다고 한다. 담쟁이 집주인이 병이 들자 담쟁이를 못견뎌 한다고도 했다. 모두 인간 중심적 사고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꽃과 나무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자연이 주는 위로를 터득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몇 해 전 봄날, 강릉의 송정 해안 숲길에 숙박시설이 들어선다는 뉴스에 아연했다. 허초희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경포대 해송 숲길은 갈 때마다 더없는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던 장소였다.
푸른 바다가 언뜻언뜻 비치고 생을 마친 가느란 솔잎들이 카펫처럼 누워 있는 길을 걸을 때의 감촉과 행복감은 설명할 길이 없다. 700년을 이어온 해안가 솔숲의 심미적 가치를 어디에 비할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솔밭길에 건물을 소유하지 못해 안달하는 존재는 인간들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경제적 논리로만 개발해야 성공이라고 믿는다.
해송 숲이 사라진다면 내 마음의 성소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송정동 주민들과 해송 숲 보존회에서 숙박시설 반대 모임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목소리를 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송정숲을 사랑하는 서울 시민임을 밝히자 주무관은 시민들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며 위로를 건넨다. 행정심판 청구 인용에 감사요청이 들어간 상태라서 대체부지를 찾는 중이라는 희망적인 대안도 전해주었다.
그 해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송정 해안 숲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연을 위한, 결국은 인간을 위한 연대의 아름다움을 느낀 순간이었다.
나무가 우리에게 소리 없이 보내는 혜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매년 1인당 1백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 아무 조건 없이 베푸는 나무의 헌신적인 생애에도 불구하고 지구에서는 매년 1천만 헥타르의 숲이 사라진다. 1천만 헥타르면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크기다. 상상을 초월한 삼림파괴의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경제 성장만이 지상 최고의 목표인 기업들, 절약보다는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인간들이 경쟁적으로 배출한 이산화탄소로 지구 온도는 버틸 수 없는 재앙으로 치닫고 있다.
숲이 사라지면 숲에 깃들어 살던 동식물도 사라지고 결국 인간도 살 수 없다. 숲을 없애고 골프장을 건설하고,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에 손을 댄 인간들에게 자연은 이미 수차례의 경고를 보냈다. 생태 위기로 잃고 있는 또 다른 위기는 자연이 무상으로 주는 선물에 경탄하고 감사할 수 있는 감성의 상실이 아닐까.
"푸라 비다(Pura Vida)!"
'순수한 삶'이라는 뜻의 인사에서 이 나라의 지향점이 드러난다. 생태 관광의 천국으로 유명한 코스타리카의 한 작은 도시에서는 새와 식물, 꿀벌, 나비 등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시민권을 갖고 있는 꽃과 나비...! 자연과 문명,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이토록 멋진 생태학적 인식은 마침내 국가별 행복지수 1위로 귀결된다.
나는 여전히 붉은벽돌의 담쟁이 집과 5층 벽을 능소화 벽화로 만들어내던 그 집 앞을 지나곤 한다. 때때로 그들이 뿜어내던 풍성한 아름다움과 삶의 활기를 추억하며. 자연이 내게 준 그 푸르른 시간들을 그리워 한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작가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