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은 다음 세대 것” 20년간 작품 밀봉한 힐마 아프 클린트
풍월당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 출간
추상미술 창시자의 불이익 이유 등 다뤄
2021-11-19 민병무 기자
#2. 부당한 대우 때문에 미술협회를 탈퇴한다. 비록 파워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신 혼자서 그렸다. 기존 미술계와 결별하고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도꼬다이’였고 ‘아웃사이더’였다. 이 시기부터 시대를 초월한 독창적 붓질을 시작했다. 팔기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그림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영원히 전시될 것을 확신했다. 다만 동시대에서는 자신의 그림을 알아 줄 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4. 2018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44년에 숨졌으니 세상을 떠난 지 74년 뒤에 열린 전시회다. 엄청난 화제가 됐다. 미술관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관객인 60만명이 몰려들었다. 교과서에도 미술사책에도 나오지 않은 화가의 전시회인데 빅히트했다. 화집은 미술관 개관 후 가장 많이 팔린 도록이 됐다. 이듬해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열린 순회 전시에는 모두 10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방문했다.
그는 바실리 칸딘스키보다 앞서서 추상화를 그린 화가다. 그런 그는 왜 알려지지 않았을까? 단 하나의 이유, 바로 여자였기 때문이다. 유럽이 거듭되는 혁명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 혼란을 겪으면서 현대미술의 흐름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당시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르의 관점에 따라 세계 미술이 규정되어 버린다. 이는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 시야가 좁거나 편견을 가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잘 보여 준다. 바르는 추상미술을 규정하면서 창시자로 바실리 칸딘스키, 피에트 몬드리안,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을 선포한다. 당시 그들보다도 먼저 혹은 비슷한 시기에 추상화를 그린 여성들이 존재했음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내려 팩트를 왜곡했다.
그 흐름의 한가운데 힐마 아프 클린트가 있었다. 그는 독자적인 영성주의 이론을 발전시켰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과 소양이 높은 예술가였다. 영성주의와 과학지식을 조화시키려 했으며, 그 우주관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존재할 수도 있는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 그의 작품은 대상이나 경계선 안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향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가 넘겨 준 바통은 이제 우리 손에 쥐어졌다. 작품을 잘 감상하고 이해하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 낸 개인과 그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의 삶은 아주 오랫동안 대화의 주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여성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없다고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힐마 아프 클린트 평전’은 광범위한 조사를 기반으로 미술가의 이례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예술가의 판에 박힌 모습과 신화를 파괴한다. 이 책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생애로 들어서는 열쇠다. 배제된 역사로 시선을 돌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이제 당신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