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재용과 신동빈의 '응답하라 尹대통령'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수년 전, TV에서 방영됐던 ‘응답하라’ 드라마를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1988년, 1994년, 1997년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시리즈는 각 시대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아낸 흥행작이다. ‘응답하라’는 문구가 참 재밌는 작품이다. 최근 재계가 마치 ‘응답하라 윤석열’이라는 글귀를 연상케 할 정도의 행보를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재계는 정권이 바뀌기 무섭게 천문학적인 투자 보따리를 풀었다. 지난달 24일부터 사흘간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한화 등 5대 그룹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들은 우리나라 한 해 예산(약 600조원)을 한참 뛰어넘는 1000조원 규모의 초대형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대부분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와 동일한 향후 ‘5년’이라는 투자 기간을 명시한 대목이 흥미롭다. 마치 윤석열 정부를 ‘투자 천조국’으로 만들겠다며 팡파르를 울린 듯한 모양새다.
정말 전례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될 만큼 경제 전망이 어두울 땐, 기업들이 투자를 미루거나 줄이는 게 일반적인 경영 방침이기 때문이다. 5년 만에 컴백한 보수 정권에 축하 파티라도 열어줄 모양인 걸까? 그런 해석도 나올 만한 것이, 지난 5년간 ‘반기업’ 정서를 드러낸 문재인 정부에서 눈칫밥을 먹어온 기업들이 ‘친기업’ 기조를 나타낸 윤석열 정부에서는 기(氣)가 살 만도 해 보인다. 대규모 투자로 화답을 하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에 때맞춰 쏟아진 재벌의 대기업 투자에 대한 재계의 설왕설래에는 윤 대통령과 친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기업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숨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바로 ‘기업인 사면’이다. ‘오너 리스크’가 항상 상존하는 기업들로선 총수의 거취에 큰 신경을 써야 한다. 경영 최종 결정권자인 회장님이 감옥을 가는 일은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회장님이 옥에 갇히는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10년간의 사례만 살펴보자. 최태원 SK 회장은 2013년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 2015년 사면으로 출소한 뒤 경영에 복귀했다. 이재현 CJ 회장도 2013년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2016년 특사로 힘겹게 사면 복권됐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2014년 부실 계열사 부당 지원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2021년에야 취업제한 조치가 풀렸다.
당시 경제단체 등 재계의 총수 사면 청원이 정부에 적잖게 들어갔다. 이는 정권마다 반복되는 행태다. 따라서 혹독하게 옥고를 치른 총수들의 전례를 생각해보면 이번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의 사면 논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게 되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사면 ‘보험’으로 수조원의 투자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가 적잖이 엿보인다.
물론 총수가 경영에 복귀하고, 이후에도 기업이 순조로운 경영을 하기 위해선 ‘친정부’는 필수적인 요소다. 오너들이 범죄자 신분을 벗어난 후에도 경영 제약을 받는 최악의 상황은 벗어나는 게 좋기 때문이다.
이번에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은 이재용 부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지난해 8월 가석방됐다. 오는 7월 형기가 만료되지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향후 5년간 취업이 제한된다. 경영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으려면 형 집행이 완료되기 전에 윤 대통령이 사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지난달 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에 동행하기 위해 재판부의 불출석 허가까지 받아야 했던 이 부회장의 이번 대형 투자 결단 이면에 ‘사면’ 두 글자가 아른거리는 건 합리적이지 않은 의심일까?
총수들이 써낸 투자 계획서 중에 삼성의 금액(450조원)이 가장 많은 것에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을 읽어내는 대신 그저 ‘우연’으로 치부해야 할까? 역시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형을 대법원으로부터 확정 받고, 내년 10월에야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는 신 회장의 롯데가 5번째로 많은 38조원을 투자키로 한 것도 사면과 떼어서 고개만 끄덕이면 될 일일까?
물론 기업들의 투자 계획을 총수 사면에만 초점을 맞춰 들여다보는 건 ‘반도체 1위’ 삼성과 ‘유통 공룡’ 롯데의 미래 준비에 대한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로선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투자는 통상 수년간에 걸쳐 준비한다는 점에서 닥치는 대로 발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규모 투자를 해서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 국익을 위한 기업의 본질이라는 점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럼에도 공교롭게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날(5월24일) 대형 투자 계획을 발표’했기에, 정치적 투자로 국민 정서를 유리하게 이끈 속내를 삼성과 롯데에 공개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규모 투자 보따리로 윤 대통령에게 총수 사면 ‘응답’을 원하는 의도가 정말 있는 지 궁금하다.
주판알을 튕기는 듯한 모습을 피하고 싶다면, 청사진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야 한다. 금액만 뭉뚱그려 한날한시에 내놓으면 선착순 달리기를 마치듯 급조한 흔적이 역력해지고, ‘다른 곳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눈치보기식 정서가 투자 발표문에 묻어난다. 그러니 투자 발표가 사면 얘기로 방향이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