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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수필 공간] 박미경 수필가 '첫눈, 나의 혁명'

2024-12-08     김철희 기자
박미경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이수진 제공

첫눈이 오는 날.
중국 서호의 한 여인을 떠올렸다. 긴 치마 위에 칼을 차고 먼 시선으로 서호 호수를 바라보는 여인, 단정히 올린 머릿결과 커다란 눈동자, 결연한 입술로 희게 빛나던 조각상이 마음에 남아 불쑥 떠오르곤 했다. 여성 혁명가라는 이름 때문이었을까.

지난여름 샤오싱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추근(秋瑾,1875~1907)은 혁명가이자 시인이다. 봉건 예법에 저항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15세에 스스로 전족을 풀었다. 청 왕조에 맞서 투쟁하다 31세에 참수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여성의 몸으로 혁명가로 활동했던 추근의 처형은 청나라 당국이 상상 못할 만큼의 반향을 불러왔고, 그 후 추근은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녀는 "혁명은 피를 흘려야 비로소 성공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D.H. 로렌스(1885~1930)는 혁명을 하려거든 재미나게 하라고 했다. 피를 흘리는 혁명이 아니고 진지한 혁명도 아니다. 획일을 추구하지도 않고 노동자 계급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작은 귀족이 되는 자부심이 있는 혁명(that we can all of us be little aristocracies on our own), 웃고 즐기며 하는 혁명이다. D.H.로렌스가 말한 혁명의 의미는 무엇일까.

혁명을 하려거든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D.H. 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중에서

며칠 전 첫눈은 117년 만에 최고의 강설량을 기록한 폭설이었다. 과자 만한 눈송이의 풍성함은 온 세상을 부시게 덮고, 순백의 설렘도 왔다. <닥터 지바고>의 설원 같은 풍경에 마음은 한없이 아득해지고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그때 카톡 알림방에 첫눈의 풍경이 올라왔다. 춘천의 지인이 창밖으로 보이는 눈오는 숲의 적막한 풍경을 올리자 자칭 '길음동 특파원'은 아파트 창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설경을 이어 올렸다. 나 역시 거실 창에 이마를 대고 하염없이 눈을 바라 보았지만 사진을 찍어 올릴 만큼의 열정은 없었다. 다른 회원들도 카톡의 내용은 확인했으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 모임의 멤버는 8명이다. 작가와 화가, 주부, 회사원, 교사, 한의사 등 세대와 직업을 아우른 20년 된 독서회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독서와 영화, 여행을 함께 해 온 세월과 그만큼의 애정이 만만치 않다. 누군가는 열심히 단톡방을 드나들며 글이나 유튜브를 올리지만 어느 때 인가부터 한적한 시간이 많아졌다. 

갑자기 회원 중의 한 사람이 우리 단톡방에 <첫눈상>을 제정하자는 의견을 올렸다.
첫눈 오는 날의 기쁨처럼 우리 단톡방에서 제일 잘 논 사람, 뭉클한 감동을 주는 회원에게 상을 주자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것만 보지 말고 행동하고, 배우고, 표현하며 기쁨을 주는 회원을 선정해 매달 시상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식어가는 단톡방을 살리려는 멋진 처방이었다.

'첫눈상'은 두 명의 운영위원을 두고 상금은 회비에서 삼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드디어 수상자가 선정되었다. 첫눈 소식이 올라오자 제일 먼저 공감을 표하고 누추도 풍요도모두 덮은 도시 아파트의 설경을 올린 '낭만' 회원이다. 수상자는 신이 나서 소감을 올리고 나머지 회원들은 축하를 보내며 저마다의 첫눈상을 꿈꾸었다. 이 첫눈상은 일 년 열두 달 지속된다. 한여름의 첫눈상도, 새봄의 첫눈상도, 낙엽속의 첫눈상 또한 그 의미와 이미지가 아름다울 것이다.

첫눈 오는 날 제정된, 회원 8명 모임의 첫눈상을 보며 나는 D.H.로렌스의 「제대로 된 혁명」을 떠올렸다. 운영위원이라는 직함과 삼만 원의 상금은 우리 모임, 아니 우리 일상의 작은 혁명이 아닐까. 권력도 권위도 급여도 없고 원하면 누구라도 위원이 된다. 투명하고 자유로운, 다소 폼도 나는 이 직책이 괜찮은 귀족이 되는 혁명은 아닐까.

첫눈처럼 통장에 날아든 상금 삼만 원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또 얼마나 많은가. 두께와 금액에 자주 머뭇거리던 장바구니 속의 책을 살 수 있다. 좋아하는 친구를 ‘씨네큐브’로 불러내 멋진 영화를 본 후, 떡볶이를 사 먹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익명 기부 찬스를 만들어 연말의  내적 충만을 누릴 수도 있다. 아니다. 이웃 캣맘 은주 씨는 정수기 필터 교체하는 알바를 한 돈으로 동네 길냥이들을 먹여 살리는데 그녀 집 앞에 길냥이들의 사료를 좀 두어도 좋겠다. 생각만으로도 삼만 원의 효용성이 날개를 편다.

오늘도 뜨거운 구호와 피켓으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간절하다. 나는 조용히 찾아온 D.H.로렌스의 「제대로 된 혁명」을 택하기로 했다. 스스로 괜찮은 귀족이 될만한 우아함과 고상함을 지닌 혁명, ‘첫눈상’같은 소소한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다. 자유롭고 유쾌한 발상과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으로 일상의 혁명을 일으키고 싶다. 
소소한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일생이 된다.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작가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제37회 대한민국 예술문화공로상(2024)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