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경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이수진 제공
박미경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이수진 제공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가을 햇살 가득한 카페에 앉아 친구와 차를 나누다 문득 나태주의 ‘이 가을에’를 떠올렸다. 한 문장으로 이만큼 가을을 잘 나타낸 시가 있을까? 친구는 아무 말이 없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황망해서 눈길을 거두었다. 두 눈에 고요히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친구의 눈물은 내내 마음을 건드린다. 아직도 사랑해서 슬픈, 너의 존재는 누구일까.

그녀는 이십여 년 넘게 나와 문학을 함께한 글 벗이고, 서로의 독자였으며, 무엇보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가족끼리도 자주 어울리는 생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지나친 감상주의자인 나에 비해 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녀의 성향으로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이미 십여 년 전에 문단을 떠나 글을 쓰지는 않지만 늘 나보다 깊은 독서와 지적 탐구로 대화를 이어가곤 했다. 그의 절필이 아깝고 아쉬워 다시 글쓰기를 종용할 때면 그저 조용히 웃기만 했다.

'떠나면 보인다'고 하던가.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문단을 떠나와서 보니 내가 젊은 날에 가졌던 문학에 대한 순정이 이제야 되살아 나는 듯해. 홀연히 어느 시구가 가슴을 울리고 문장의 구조적 매력에 흠뻑 빠지기도 해"
패거리 문학, 문단 권력, 상업화된 문학의 가치에 염증을 내던 그녀는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갖고 있던 문단의 위치와 명예와 독자 모두를 버렸다.
문학에 대해 가졌던 동경과 사랑이 떠난 후에, 한 줄의 시가 주는 순수한 눈물을 이제야 얻은 것일까. 

 유명해진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도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다
 기록을 남기거나 쓰는 글에 연연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창작의 목적은 자아의 표출이지 허세나 출세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수치일 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유명해진다는 것은' 중에서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던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이 시는 허명에 들뜨는 순간의 나를 여지 없이 죽비로 내리친다. 그리고 한없는 위로를 준다. 문단에서 소외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고 웃고 떠들며 그 안에서 인기를 누리려 애쓰고 '나는 건재해' '나는 이렇게 잘 나가'를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과장된 시간들을 보내지는 않았던가.

나는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왜 사람들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세상과의 소통에 얽매이는 걸까. 왜 자신이 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달콤함을 찾았던 걸까.

캐나다의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대중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기이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술가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사회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주에 열광하는 청중들을 뒤로 하고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32세에 모든 콘서트를 중단했다.

스튜디오에 박혀 오직 녹음으로만 완벽한 음악을 추구했다. 대화나 인터뷰조차 전화로만 응했던 그는 음악 외의 모든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며 고독에의 의무에 충실했다. 세상과 청중의 박수에서 떠나 얻은 자발적인 고립을 통해서 가장 단단한 존재감으로 확인되는 글렌 굴드는, 나보다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에 매달렸던 지난 시간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인디언들은 11월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달'이라고 명명했다.
낙엽으로 덮여있는 가을의 풍경 너머에는 무엇이 담긴 걸까. 가을은 사랑스런 봄날의 꽃들, 생명력 가득한 여름과 그 열매들의 풍요를 알고 있다. 폭풍과 뇌우, 목마름의 순간도 기억한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줄기로 가는 물길을 닫아 잎을 강제로 떨어뜨리는 떨켜의 고독한 그림자가 지나간다. 스스로 택한 고립 속에서 바람과 풀잎과 고요와 탄식을 발효하는 낙엽의 자존감은 모든 계절을 품은 11월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나는 보이지 않는 가을의 시간 속에서 '아직도 사랑해서 슬픈, 너'는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친구는 누구보다 문학을 사랑했지만 떠났고, 나는 내 것이 되지 않는 문학의 주변을 여전히 맴돈다. 어느 날은 외로워 광장으로 나서지만 다시 돌아온 밀실에서 홀로 밤을 지새워야 한다.

나는 그런 운명을 가진 문학이 좋다. 손을 잡고 있다고 믿었으나 번번이 놓쳐버린 문장들, 숨겨진 은화처럼 하고픈 말들을 가슴 속에 숨긴 채 풀어낼 수 없는 글들, 못났어도 때로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던 나의 서사들을, 아직도 사랑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나 자신으로 충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걸어갈 것이다. 고독이라는 신발을 신고 덜그덕 거리며 문학의 길을 향할 것이다.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작가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제37회 대한민국 예술문화공로상(2024)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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