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박미경 수필가 '한 예술가를 살게 한 것들'
그의 몸을 지탱하는 근육과 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다. 머리카락, 속눈썹, 그렁그렁한 눈동자와 긴 콧날에 내려앉은 우수, 심지어 그의 숨결, 야위고 기다란 손가락에서 묻어 나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고뇌까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슈필만 (애드리엔 브로디 분)을 보며 든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 상황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슬픔이 온몸에 절어있던 피아니스트. 극도의 빈곤과 비참 앞에 쇼팽의 '녹턴'을 치던 실존의 처연함은 오래전 잊혀진 한 사내를 떠올리게 했다.
생의 덫에 갇혀 있던 사람. 그에게는 다섯 딸이 있었다. 리라, 유라, 소라, 연라, 경라.나와 유년 시절을 함께한 이들 자매는 이국적이고 세련된 이름과는 달리 우리집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가난한 예술가의 딸들이다. 첫째인 리라는 나와 동갑이었다.
아침이면 우울한 얼굴로 연탄불에 아교를 녹이던 리라 아빠는 그것으로 바이올린의 낡고 어긋난 부분을 붙이곤 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서구형 얼굴의 그가 풍기는 고독한 기품은 산동네에는 어울리지 않아 이방인 같았다. 울어서 부은 듯 표정은 어두웠고 늘 검은 코트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오갔다.
밤마다 술에 취해 들어왔고 간간이 들리던 연주 소리는 새 부인과 다투는 소리로 변하기 일쑤였고 바이올린이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내가 조금 자란 뒤에 알게 된 사실은 그는 모 국립 교항악단의 단원이었고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으나 대중음악과는 죽어도 타협하지 않는 독불장군이었다.
당시에 흔치 않던 연애결혼으로 유복한 집안의 여자를 만나 세 딸을 낳고 행복했다. 불행은 느닷없이 아니 우리가 알지 못할 때 번져오는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퍼진다. 예기치 못한 젊은 아내의 죽음으로 한 집안의 빛깔은 백팔십도 뒤집혀 진다. 가장은 충격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살림도 몰락하여, 어찌어찌해서 서울 변두리 우리 집으로 세를 들어온 것이다.
산동네의 초라한 마을엔 대부분 대가족이 모여 살아 소란스러웠다. 어스름한 저녁의 공기를 타고 바이올린의 선율이 흘러나오다가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 아이들의 웃고 우는 소리에 묻혀 버리곤 했다.
어느 날 어린 딸들을 돌봐 줄 새 부인이 들어왔는데 그의 처가에서 데리고 있던 가정부라 했다. 내 눈에도 구전동화에서 봤던 전형적인 계모의 얼굴이라 리라가 미움을 받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연이어 두 딸이 또 태어났다. 삶은 그렇게 이어졌다.
리라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결석이 잦았다. 등굣길의 친구들에게 계모에게 받은 서러움을 이르곤 했다. 때때로 아빠가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는데 자기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며 어른처럼 한숨 지었다.
궁핍하고 소외된 그의 집에서도 기적같이 아름답고 풍요롭던 순간이 남아있다. 무료한 어느 휴일, 리라네 방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뭇 낯설었다. 낮술을 한잔한 탓일까. 리라 아빠가 아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춤을 추게 한 것이다.
'산토끼' '나비야' '코끼리 아저씨' 같은 동요 메들리가 바이올린의 선율을 타고 방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취기 어린 얼굴로 신나게 바이올린을 켜는 아빠의 허리를 잡고 아이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빙빙 돌기도 하고 방방 뛰기도 하며 아이들이 날아올랐다.
피아니스트 슈필만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일지도 몰랐다. 단칸방의 우울한 공간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연주는 너무 밝아서 슬픈 듯했다.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바이올린의 이중주는 허무와 빈곤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음악가의 절창인 듯, 천상의 풍경처럼 남아있다.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사라져 간다. 경쾌하고 맑은 아이들의 에너지를 만나기 힘든 시대다. 해 질 녘이면 좁은 마당과 골목길을 가득 채우던 다섯 소녀의 재잘거림이 그리워진다. 어느 고독한 예술가를 살게 한 것은 다섯 딸의 웃음과 눈물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리라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사했다. 어느 해 가족 모두 미국으로 갔다는 바람의 소리만을 들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슈필만의 기막힌 엔딩처럼 이국의 바이올리니스트 그에게도 다시 행운의 여신이 찾아 왔기를.
아직 이 하늘 아래 살고 있기를.
◆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 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 17인> <50 헌장(공저)> <독학자의 서재(공저)>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