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주방 창으로 학폭을 목격했다.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무심코 내다본 창밖에 중학교 남학생 몇몇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주택가 담 모퉁이에서 아이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리는 한 아이에게 무언가 추궁하고 협박하는 듯 보였다. 학폭이 자행되는 현장이었다. 순간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당장 달려나가 녀석들을 야단치거나 타이르고 수세에 몰린 남학생을 도와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창밖의 사건을 외면하고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방일을 서둘렀다. 얼마가 지나 다시 창밖을 봤을 때는 모두가 사라진 뒤였다. 그래,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가보려고 했지. 비겁한 변명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괜히 참견했다가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들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춘 채.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날의 창밖 풍경과 나의 부끄러운 양심은 오래도록 심연에 갇혀있다가 자책감으로 떠오르곤 한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20대에 쓴 <스쳐지나 가는 사람들>을 읽다가 그 날의 나를 보았다.
'밤에 골목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멀리에서부터 한 남자가 보였고-우리 쪽으로 달려올 때 비록 그가 약하거나 누더기를 입고 있더라도, 누군가 그를 쫓아와 소리를 지르더라도, 우리는 그를 붙잡지 않고 그를 가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중략) 기어코 우리는 그렇게도 많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가. 두 번째 사람마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우리는 즐거웠다'
타인을 돕지 않을 변명을 생각하면서, 술 취한 척하면서, 바쁜 일이 있는 척하면서 타자의 고통을 외면한다. 어쩌면 그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살인 사건 따위에 연루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침내 그 타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우리는 '즐거웠다'는 카프카의 일침은 일상이 방관자인 나의 내면을 아프게 질타한다.
일본에서 의학 공부를 하던 중국의 소설가 루쉰(1881~1936)이 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둔 것은 중국인들의 '구경꾼 근성' 때문이었다. 수업 시간에 일본인 교수가 시간을 때우느라 보여준 환등기에서 동포들의 비열함을 마주한 것이다. 러시아군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소에 구름떼처럼 몰려가 구경하는 얼빠진 군상들. 구경꾼들은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에 어떠한 자각과 분노도 없다.
이 장면에 충격을 받은 루쉰은 자기 민족의 구경꾼 근성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육체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 보다 정신을 고치는 일로 문학혁명을 생각했고 작가가 되었다. 저 유명한 <광인일기> <아큐정전> 등이 태어난 배경이기도 하다.
방관자와 구경꾼, 무관심은 의도적인 눈감기일 수도 있다. 나의 생존이나 자존심을 위해 불쾌하거나 받아들이기 괴롭다면 고의로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어 입력된 정보를 편집하고 걸러내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신념과 자아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라도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라면 눈을 감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에 눈감고, 불의에 눈감고,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비겁한 속성이 우리 뇌에 작동한다고 합리화를 해볼까.
이러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절대 눈을 감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도된 고속도로의 참사를 잊을 수 없다. 새벽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트럭이 가드레일을 받고 넘어졌다. 뒤따르던 차량들은 사고 현장을 피해서 빠르게 지나가는데 다른 트럭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멈췄다.
곧바로 사고 차량으로 달려간 사람이 운전자를 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CCTV에 잡혔다. 이어서 달려오던 컨테이너 차량이 넘어져 있는 사고 차량을 그대로 들이받았고 두 사람은 끝내 숨졌다.
사고 운전자를 살리려던 사람은 통신설비기사 곽씨였다. 한 주 내내 집에 오지 못했는데 초등생 딸의 졸업식에 가기 위해 연장 근무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백번도 더 생각해 봤지만 그 시간에 그 장소를 또 지나쳤어도 그 사람은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사람인 걸 압니다"
백번을 생각해도 그 자리에 있을 사람! 아내의 울부짖음 속 외침에 그 아픔을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의인의 희생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숭고함으로 정화 시킨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예수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아니라 그를 불쌍히 여기고 자기 노새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준 사마리아 인이 진짜 이웃이라고 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의인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우리나라에서도 '착한 사마리아인법'을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가면 벌을 준다는 얘기다. 그러나 타인의 존재를 나와 내 가족처럼 아파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이 법으로 가능한 일일까. 나는 20년 전 학폭 현장을 보고도 못 본 척했던 죄로 방관자, 구경꾼으로서의 나에 대한 혐오가 여전히 있다. 내가 치르고 있는 소리 없는 형벌이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작가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