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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수필 공간] 박미경 수필가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와라'

2024-07-21     김철희 기자
박미경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토토 사이트 커뮤니티DB

단톡방에서 계속 신호음이 울린다. 오래전 임기를 마친 어느 언론단체의 소환이다. 아, 이홍훈 위원장님을 향한 그리움의 문자들이 풀잎처럼 피어난다. 돌아보니 그분과 이별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다정한  미소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런 인품을 가진 분을 만난 것은 우리의 홍복이었지요' '평화로운 하늘에서 정원을 가꾸고 계실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모의 글들. 그분과 함께하던 날들의 사진도 속속 올라왔다. 갑자기 부재하던 한 인물이 선명히 떠올랐다. 추모의 글을 올린 분의 의리도 아름다웠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면 여전히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다. 

한달에 한번 모여 신문윤리에 어긋나는 기사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제재를 가하던 이 단체의 중심에 이 위원장님이 계셨다. 평생을 법조계에 투신하고 개혁적인 판결로 '법원 내 재야인사'로 불리던 분이다. 늘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옹호했기에 퇴임 후에도 후배 법관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으셨다. 그럼에도 어떠한 권위의식이나 위세를 찾을 수 없던 그분이 우리에게 남긴 이미지는 자상함과 조용한 미소였다. 

2년 임기를 마치면  해체되는 다른 기와는 달리 이 위원장님의 주선으로 우리는 가끔 만나 담소도 나누고 맥줏집도 순례하며 광화문에서의 추억을 만들었다. 노모가 사시던 전라도 고창의 시골집에서 꽃밭과 나무를 가꾸는 시간의 행복을 자주 말씀하셨다. 암 투병 중에 만날 때에도 가족의 안부며 근황과 관심사에 대해 물어보고 경청해주시던 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던 시대의 한 어른, 그분이 남긴 온유한 기운이 이 여름날, 우주의 어느 끝에서 날갯짓하고 있다. 

7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떠오른다. 국민 시인이라 해도 좋을 황금찬 선생님이다. 99세를 일기로 평생을 시와 함께 산 이 신화적인 시인은 늘 문인들에게 삶의 아름다운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트레이드마크인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은발의 노신사. 선한 눈매와 나직한 음성,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니 아련해진다. 선생님은 분명 하늘의 별이 되어 지금도 지상의 꽃들과 대화를 나누실 것만 같다.  

십여 년 전 동숭동 카페에서 들려준 말씀을 기억할 때마다 시심의 근원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면 청각이 약해져 남들이 하는 소리를 잘 못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거든. 꽃이 떨어질 때의 소리, 별이 질 때의 소리..."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구순의 나이에도 순수한 아이 같은 눈과 마음 때문에.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시였다.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와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사람아          
- <꽃의 말>

친필로 건네주신 이 시를 대할 때마다 내 입술이 꽃을 만들어 발화해 본 적이 있던가 돌아보게 된다. 늘 말의 생명, 말의 향기를 말씀하시던 성자와도 같은 분이셨다.

문단의 큰 어른이면서도 대접받는 걸 사양하고 항상 먼저 베푸시던 분이다. 금쪽같은 딸을 잃은 슬픔을 평생 가슴에 간직한 채 사랑으로 세상을 대하던 시인의 생애 자체는 한 편의 유장한 서사시였다. 

젊은 날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시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문단에서 인연을 맺은 문인들, TV 매체 등을 통해 그분의 시를 좋아하고 향유 하는 독자들까지 헤아린다면 천문학적 숫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사랑과 축복의 말을 남기고 별이 된 시인. 그리워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울적한 날이면 전화를 하는 친구가 있다. 긍정과 공감의 아이콘인 P다. 그는 누굴 만나도 먼저 인사한다. 산행하며 스치는 사람들, 거리에서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꼬마... 단 한번도 그냥 지나치는 걸 본 적이 없다. P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면 갑자기 그 공간이 다른 빛깔의 공기로 채워지는 것 같다.

마음이 스산해질 때 전화를 하면 내가 행복한 사람인 이유를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가지쯤 대며 결국엔 웃게 만든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소중한 것들이다. 

너 숨 쉴 수 있잖아. 행복하지? 너 배고프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잖아. 행복하지? 사랑하는 가족 있지?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고 볼 수 있지? 그리고 글 쓰는 너만의 세계도 갖고 있지? 동의할 수 없지만  니가 아직도 이쁘다고 생각하지? 등등 

이 친구의 다정함이, 낙천성과 유쾌함의 말들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고 따스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우리 곁에서 사라진다. 꽃도 사람도 사랑까지도. 그들이 살았을 때 세상에 남긴 아름다운 기운은 삶의 모퉁이에서 문득 되살아나곤 한다. 한때 우리 곁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 다시 돌아올 수 없어도 그들이 남긴 미소와 친절과 사랑의 날갯짓은 비가 되고 구름이 되고 꽃이 되고 바람이 되어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작가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