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리포트] 권오갑 HD현대 회장 “바다의 무한가능성 활용해 미래 신사업 발굴'
[데일리한국 안병용 기자] 프로 스포츠계에서 ‘원클럽맨’은 한 구단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팀의 상징적인 존재를 일컫는다. 구단과 선수,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야 가능할 것이다. 이에 빗대보면 권오갑 회장은 50주년을 맞이한 HD현대의 살아 있는 역사로 평가할 만하다. 그룹 전신인 현대중공업의 사원으로 입사해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올해 무려 45년차 ‘원클럽회사원’이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1978년 플랜트영업부 사원으로 현대중공업에 첫발을 내디뎠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역사가 1972년 3월23일 전신인 현대조선이 울산 미포만에 현대울산조선소 기공식을 열면서 시작됐으니 권 회장은 회사의 수많은 희로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나 다름없다.
권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발탁돼 일찍이 그룹 업무를 맡았다. 현대가(家)와 더욱 가깝게 된 연결고리는 축구다.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관련 업무를 함께 하면서 가까워졌고, 이후 정 이사장의 복심으로 불리며 2007년 부사장으로 승진해 본격적으로 현대중공업의 얼굴로 나서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현대오일뱅크에서 사장을 지내며 4년 연속 정유업계 영업이익률 1위를 기록하는 등 그룹 매출의 약 60%를 담당하는 주력 회사로 성장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매주 충남 대산 공장으로 출근하며 노조와 끈끈한 신뢰를 구축한 결과, 23년 만에 ‘임금위임’이라는 협력적 노사관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주요 임원들과 함께 주유소 현장근무를 하며 솔선수범에 나선 것 역시 유명한 일화다.
노조와의 관계에서 유연성만 드러낸 건 아니다. 2014년 조선업황 악화로 사상 최대 규모의 영업 손실을 내던 현대중공업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땐 과감성과 추진력이 돋보였다. 직원을 4000명 이상 줄이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선 끝에 조선업 사상 최악의 암흑기로 불리던 2016년 흑자전환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였다. 구조조정에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겠다며 4년 넘게 보수를 반납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을 정상화시킨 공로는 2018년 현대중공업지주 부회장을 거쳐 2019년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 토대가 됐다. 권 회장이 가장 신경쓰고 있는 대목은 ‘안전 경영’이다. 조선과 정유 등 거대 장치산업 위주의 그룹 사업구조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2020년 경영진들과 함께 울산조선소 현장 안전을 점검한 뒤 권 회장은 “안전관리 종합대책의 시행 성과를 평가해 필요하다면 일벌백계하겠다”면서 “안전에 있어서만큼은 노사가 따로 있을 수 없는 만큼, 안전한 사업장을 위한 노조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렴해 반영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사업적으로는 건설기계와 수소 등 신성장동력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먼저 지난 2021년 두산인프라코어(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해 기존 현대건설기계에 시너지를 더했다.
권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건설기계를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며 “한국의 건설기계 산업을 대표하는 ‘국가대표’라는 자긍심과 사명감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건설기계 부문 중간 지주사인 현대제뉴인은 2025년까지 매출 10조원을 달성하고, 세계 시장점유율도 5% 끌어올린다는 포부다.
최근 사명에서 ‘중공업’을 떼고 HD현대로 변경한 이유도 미래 신성장동력 발굴과 관련이 있다. 수소 사업이 대표적이다. 2030년까지 생산, 유통, 공급, 활용에 이르는 수소 밸류체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현대오일뱅크와 한국조선해양이 핵심 역할을 맡는다. 조선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이 대기 중 탄소 배출을 줄인 블루수소와 탄소가 배출되지 않는 그린수소를 생산하면, 정유 계열사인 현대오일뱅크가 전국에 180여개 수소 충전소를 구축해 유통과 공급 및 활용을 하는 형태다.
이는 2021년 발표한 ‘수소 드림 2030 로드맵’에 담겨 있다. 권 회장은 전 세계적으로 수소 운송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따라 수소운반선 개발, 수소연료전지 추진선 건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수소연료전지 추진선은 기존 내연기관 선박보다 에너지 효율이 40%이상 높다. 대기오염 물질도 배출하지 않아 미래 친환경 선박으로 평가받는다. 수소 선박으로 가는 중간 단계인 암모니아 추진선은 2025년까지 상용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선해양 부문도 놓칠 수 없는 핵심사업이다.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등의 계열사들을 자회사로 둔 조선 부문 컨트롤타워인 한국조선해양이 중심에 있다. 지난해 한국조선해양은 197척을 239억9000만 달러에 수주해 목표인 174억4000만 달러보다 38% 초과하는 실적을 거두는 등 호황의 기지개를 켰다.
권 회장은 부회장 시절 한국조선해양의 초대 대표이사를 지내며 기술 중심의 미래 인재 양성에도 힘써왔다. 조선업 불황에도 유일하게 매년 신입사원을 모집해 2016~2021년 총 3000여 명을 채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대 대학원에 석·박사 융합 과정인 ‘스마트 오션 모빌리티’ 과정을 개설했다. 조선해양공학에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을 융합해 조선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이끌어 갈 미래 인재양성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권 회장의 기술경영 비전은 경기도 판교에 건설한 글로벌R&D센터 GRC에서 구체화된다. 권 회장은 지난해 말, 한국조선해양·현대제뉴인·현대오일뱅크 등 총 17개사를 입주시켜 그룹의 기술력을 한곳에 모아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룹의 제품 개발관련 기초 연구를 포함, 미래 신사업을 창출하는 신기술 확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술 경영에 대한 의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가전 전시회인 CES에 참가한 행보에서 엿보인다. 올해는 바다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바다의 무한한 가능성을 활용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오션 트랜스포메이션’ 전략과 성장 동력을 글로벌 무대에서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새로운 50년을 기약하며 HD현대로 사명을 바꿨다. 권 회장은 “과거 50년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영광의 역사였다면 미래 50년은 기술과 환경, 디지털이 융합된 혁신과 창조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