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박미경 '불안의 힘'
정신이 번쩍 든다.
"불안에 휘둘리면 안돼, 받아들이면 넝쿨처럼 옭아매고 헤어날 수 없게 만드는 존재야. 불안이 찾아오면 발로 뻥 차버려야 해" 문학 세미나 차 대부도 바닷가에서 1박을 했다. 룸메이트인 K에게 요즘의 내 심사를 털어놓자 그녀가 단박에 내려준 처방이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며칠 전부터 밤이 되면 극도의 불안이 찾아왔다. 호흡도 힘들어 지고 가슴은 무엇인가에 짓눌린 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K는 불안을 감정이 아닌 불응할 존재로 인식하고 내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불안이라는 존재를 기다리기도 하고 불러들인 것도 같다.
특히 혼자 있는 시간이면 그 감정을 꺼내어 증폭시키고 끝없는 상상의 나락으로 가곤 했다. 십수 년을 함께한 반려견의 죽음에 우리 부부는 침묵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40년 지기 친구의 느닷없는 죽음으로 인한 충격도 가시지 않았고, 참척의 아픔을 겪은 선배의 심정을 헤아리는 밤이 편안할 수는 없었다.
오빠가 다섯인데 세 분이 세상을 뜨셨다. 남은 한 분이 최근 암 판정을 받았다. 예후가 극히 안 좋은 암이라 가족 모두가 불안 상태다. 의사는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수술 이후의 항암치료, 합병증 위험, 다른 기관의 전이나 재발 여부 등 난관이 만만치 않다. 오빠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수술을 거부한다. 진통제로 버티며 살다가 생을 마치겠다고 한다.
무엇보다 당신의 의지를 존중해야 마땅하나 자식들의 반대 또한 무시할 수는 없어서 가족회의는 표류 중이다. 오빠는 오랫동안 부인과 불화해 헤어지고 만년에 사랑하는 여인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주고받은 상처와 아픔들, 성장한 자식들의 입장을 헤아리면 복잡한 심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나의 불안은 오빠의 암 진단이 아닌가 보았다. 그 무거운 상념들이 연계되었을지 모른다.
불면으로 뒤척이다가 눈을 뜨니 새벽 3시다. 천천히 거실로 나가 예수상에 무릎을 꿇는다. "하느님, 저의 오빠를 살려 주세요"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10년이 넘는 냉담을 마치고 다시 신앙으로 회심한 지 1년 남짓이다.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수동적 삶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로 살아가는 위버멘쉬(Übermensch)를 지향하는 니체의 철학에 기대어 보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너무나 허약한 나의 실존을 마주하면서 스스로 발길을 돌려 무릎 꿇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하느님, 모든 것을 맡기니,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했다. 여전히 신에게도 온전히 의탁하지 못한 불안정한 어린양일 뿐이다.
이 밤 오빠 역시 잠들지 못하리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올린다. 이반 일리치는 고등 법원의 판사다. 가까웠던 동료들은 불치병이라는 소문에 승진과 인사이동에 대한 이해타산에 바쁘다. 아내는 연금이 줄어들까 걱정, 딸은 자신의 결혼 계획이 엉망이 될까 걱정한다. 기껏해야 약간의 허영과 품위를 지키는 일에 인생을 허비했다는 자각, 자신이 고수했던 가치들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번뇌에 사로잡힌 이반의 불안이 오빠의 심경과 오버랩 된다. 아니 그것은 나의 심연에 갇힌 두려움이기도 하다. 이 상념의 꼬리들은 나에게 또 하나의 불안으로 다가온다.
뭉크의 <절규>가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전시장을 찾았다. 혹시 뭉크의 비명과 공포에 전염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어린 시절 누이와 엄마를 잃고 신경 쇠약에 시달리던 뭉크에게 불안은 떨칠 수 없는 그림자였다. 그럼에도 그가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광경을 보았다. 사랑에 굴복하고, 질투와 이별, 우울과 절망을 겪으며 그것을 화폭으로 옮겼다. 불안에 포획당하지 않고 신경을 예민하게 벼리며,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그림으로 뭉크의 생애를 따라가다가 그를 치유한 것은 불안을 녹여낸 예술이었음을 확인했다. 뭉크는 오슬로의 베케르 베르크 다리에서 절규하는 순간조차 삶의 뜨겁고 격렬한, 하나의 풍경임을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늘 불안의 연속이다. 인간은 애초에 '우연히 내 던져진 존재'이기에 불확실한 내일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불안이 그저 해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삶에서 불행한 사건은 불가피한 것이고, 불안은 그 미지의 불행을 심적으로 대비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살아있으므로 찾아온 이 불안을 마주하며 글을 쓰는 동안 마음이 한층 편안해진다. 오빠를 위해 야채스프를 끓인다. 무, 당근, 우엉, 표고버섯으로 끓인 물이 암에 좋다니.... 나는 암호를 보내듯 문자를 두드린다.
"오빠, '무 당 우 표' 갖고 갑니다"
순간 발로 뻥 차버린 듯 불안이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다.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작가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