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여성지에서 일했던 경험 가운데 아직도 후회되는 한 장면이 있다. 마감에 맞춰 교정지를 대조하며 최종 OK를 보는 시간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평소 나를 '사수(師授)'로 부르며 따르는 후배 P의 교정지를 보다가 몹시 화가 났다. 문장이 잘려나가고 숫자까지 오류가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이런 실수를 하는가 싶어서 다음날 찻집으로 불러 책임감 운운하며 훈계를 해댔다.
평소 같으면 "헐,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봐요. 요즘 밤마다 어떤 넘이 괴롭혀서.... 하하하" 하며 특유의 너스레와 유쾌함으로 넘어갔을 후배인데 뜻밖에 눈물을 뚝뚝 떨구며 사과했다. 믿고 의지하는 선배에게서 처음 들은 지적이 민망하고 아팠으리라. 나 역시 가볍게 주의를 주었어도 될, 늘 겪는 오자(誤字)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질책했다.
그 날 나의 태도는 어쩌면 인정욕구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직장 선배이기 전에 회사에서 부여한 권력을 과시하거나 실력을 인정해 달라는 욕구가 내 감정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관심 받고 싶어하는 '관종(觀種)'이란, 그 근저 역시 사랑과 인정을 갈망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보면 그 심리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 역시 적당히 포장하고 은닉해 왔을 뿐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살아왔다.
젊은 날에는 인정욕구에 시달렸다. 더 눈에 띄는 기사, 더 멋진 인터뷰, 편집장을 만족시키는 기획안을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때로 나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경주를 하는 기분이었다. 불안과 피로와 염증이 간헐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인정하는 나의 키 높이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들면 마음에 풍랑이 일었다. 그 간극 만큼 갈등과 불안을 겪어야 했다.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우리 동네 S고등학교의 교정을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이 시를 보았을 때, 분초를 다투며 대입에 몰두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꺾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를 유행가처럼 들었던 나의 청소년 시절과는 한참 거리가 먼 문구였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학생들의 무거운 어깨를 어루만지는 듯한 나태주 님의 시에 정작 위로받은 사람은 나였다.
우리는 모두 '너무 잘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다. 그것은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헤겔은 인간의 모든 갈등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했던가.
남들이 나를 인정해 줄 때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삶은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 '인정 투쟁'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이를 증명하듯 SNS의 폭발적인 관심은 사뭇 혁명적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는 허위와 위선도 난무하나, 자기 과시와 표현에 적극적인 젊은 세대의 인정욕구를 발산하기에 좋은 놀이터다. 팔로워 수는 돈과 인기를 보장하는 인플루언서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나는 페이스북에 '알 수도 있는 친구'들로 도배 되어 있는 인물들이 불편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 댓글을 달았는지, '좋아요’'를 눌렀는지 허락 없이 공개되고, 내가 좋아할 만한 기사까지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의 친절이 불쾌하다. 서로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주고, 서로의 관객이 되어주는 SNS의 무대,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 대한 갈구를 댓글과 '좋아요'로 해소하는 이 공간이 또 다른 가면처럼 느껴진다.
나는 누구인가. 가끔 자신에게 묻곤 한다. 젊은 날엔 나를, 나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라는 주체의 특성을 몇 줄의 프로필로, 한 장의 명함으로 설명 할 수 있다는 만용과 치기였을 것이다.
세월을 돌이켜보면 뭔가를 이룬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의 도달점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좌표가 불완전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조차 모호할 때가 많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있을 때도 어쩌면 내게 진짜 저런 모습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탄력 있고 유연한 사고로 확장된 것인지, 날마다 파괴되고 있는 뇌세포가 농간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 확신을 잃은 내 모습이, 인정욕구에서 벗어난 내 모습이 그렇게 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인생은 제로섬 게임 같은 것이라 믿는다. 내가 상실한 부분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채워진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상계처리 한다.
예리하게 벼렸던 자의식도, 타인에게 받았던 상처도, 돋보이고 싶었던 욕망도 비워내고 나면 예상치 못한 여유와 관망, 미소 같은 선물도 얻는다. 비워진 공간에 채워지는 충만과 자유, 그 아이러니한 기적이 나는 좋다. 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박미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월간문학(1993) 등단 △수필집<내 마음에 라라가있다>, 인터뷰 에세이집 <박미경이 만난 우리시대 작가 17인><50 헌장>외 △동포문학상, 월간문학 동리상 등 수상 △현재 대표에세이 동인,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