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개 지역에 2244기 고인돌 집중분포
강력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 형성 입증
해학 넘치는 귀얄·덤벙 등의 분청사기
200년간 유행하며 도예의 미래 제시
[데일리한국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전남 고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이는 아마 세대별로 많은 차이가 있을 터다. 연령대가 있는 분들은 슬픈 역사의 땅 소록도를 먼저 떠올릴 것이고, 요즘 세대는 나로호 로켓을 발사한 나로우주센터를 우선 기억할 수 있다. 나로우주센터는 세계에서 열세 번째로 세운 우주기지다.
고흥의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자랑거리다. 번잡한 도시의 공해는 찾아보기 힘든 고흥은 별 관찰에도 최적의 장소다. 요즘은 어딜 가나 인공 불빛으로 인해 맑은 별들을 보기 힘들지만, 고흥에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붕이 없는 진지도 전망대가 관측지로 적합하다. 구름 없는 밤, 보름과는 먼 날로 정해서 돗자리를 들고 전망대에 올라 바닥에 누워 온몸으로 별빛을 맞이하는 ‘별빛샤워’는 도시 사람들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짜릿한 황홀감을 선사한다.
만약 가을에 고흥을 찾는다면 단풍이 아름다운 편백 숲 산책로의 상큼한 공기와 피톤치드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고흥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러나 꼭 알아야 할 흥미로운 ‘문화 역사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 유적지가 바로 고흥에 있다는 사실이다.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은 전 세계의 40퍼센트 이상이 우리나라에서 발견됐는데, 최대 밀집 지역이 바로 고흥이다. 그동안 무분별한 개발과 도로 건설로 인해 많은 고인돌이 허물어지고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흥은 194개 지역에 2244기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돼 있는 고인돌 문화 중심지다.
고흥지역 고인돌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두원면 운대리 고인돌 조사를 시작으로, 포두면 장수제 고인돌(1984), 고흥~벌교 도로 확장·포장 공사로 발굴된 고인돌(1998~1999) 등 추가 발굴 조사됐으며, 현재 4개의 고인돌군이 전남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특히 운대리 고인돌에서는 세계 최초의 비파형청동검이 발견돼, 이곳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비파형동검은 옛 악기인 비파모양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대부분 한반도 남해안지역, 특히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많이 출토됐다. 이 유적들에서는 동검, 거울 등과 천하석제 곡옥 및 청동제 유물들이 출토됐다. 당시 호남지역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 세력이 존재했던 곳으로 마한과 같은 정치 집단이 출현할 수 있었던 단계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이전 시기에 유행했던 고인돌이 지배자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집단의 기념물과 같은 성격을 띠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후의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는 매장될 ‘한 사람’을 위해 깊은 묘광을 파고 최고 수준의 청동기를 다량 넣었다는 점에서 보다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했음을 알려준다.
놀라운 것은, 고흥군 5세기 초 야막 고분 유적에서 곡옥(曲玉·머리에 구멍이 뚫린 굽은 형태로 가공한 옥)이 중국제 청동 거울, 대도 등과 함께 출토됐다는 사실이다. 이들 물품은 최고 권력의 전형적인 상징물이다. 일본 왕실이 떠받드는 삼종신기(三種神器·청동 검, 거울, 구슬)보다 앞서는, 신기의 원형이 왜 고흥, 보성, 화순, 함평 등 호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왔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고분에서는 금동관, 금동신발, 구리거울, 환두도(環頭刀·둥근 고리 칼) 등 최고 권위자를 상징하는 유물이 출토됐다.
결국 5~6세기에 걸쳐 고흥 반도 일대와 섬진강 유역에 강력하고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이 일본 왕실의 원류와 직접 연결되어, 일본에 전수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화 역사적 사실의 둘째. 고흥은 조선 초기 가장 일상적이었고 중요한 그릇, 분청사기(粉靑沙器)의 핵심 생산지였다.
분청사기는 회색 또는 회흑색의 질(태토·胎土)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조선 초기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1930년대 미술사학가 고유섭(1904~1944)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란 용어에 반대해 새롭게 지은 단어가 바로 ‘분장회청사기’다.
분청사기는 퇴락한 청자(靑瓷)가 출발점이다. 14세기 후반 강진의 청자 자기소(磁器所)가 해체된 후 전국으로 흩어진 사기장들에 의해 생겨난 생활 용기다. 분청사기는 조선 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해 그릇의 질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세련되게 크게 발전해 절정을 이루었고,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태종(재위 1400~1418)과 세종(재위 1418~1450) 연간에는 왕권을 강화해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위해 재정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고 주요 세원의 하나가 바로 자기로 전국에 분포한 자기소를 통해 공납됐다. 이 때 공납된 자기는 대부분 분청사기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白瓷)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 공급을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맡게 되자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면서 주로 민간용으로 생산하게 됐다. 또한 중앙 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파급되면서 백자 생산이 계속 증가하면서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도자기의 주류가 됐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고작 200여 년 남짓 번창했지만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에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을 뽐낸다.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지극히 현대적인 무늬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홍콩 태생으로 동양 도자문화에 정통했던 영국의 저명한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1887~1979)는 “분청사기는 속물적 근성이 없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다”라며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분청사기가 이미 제시했고,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극찬한 바 있다.
또한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천부적인 안목과 혜안을 가졌던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1916~1984)도 그의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하고 수수한 멋을 이렇게 설파했다. “이 가락진 멋과 싱싱한 아름다움을 네가 알아본다면 좋고 모른다면 그만이지...”
이에 따라 분청사기는 잠시 잠깐 반짝 빛났다가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시공을 가로지르며 다시 태어나 현대 도자문화에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면서 시대와 지역과 장르를 초월하여 수많은 도예가들의 뮤즈가 되고 있다.
분청사기는 분장과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에 따라 7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판 후 백토나 자토(裏土)를 감입(嵌入)해서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象嵌), 둘째는 무늬를 도장으로 찍고 백토분장(白土粉粧)을 한 후에 닦아내서 찍힌 무늬가 희게 나타나는 인화(印畵), 셋째는 분장 후 무늬 이외의 백토를 긁어내 태토의 어두운 색과 분장된 백색을 대비시켜 무늬를 표현하는 박지(剝地), 넷째는 분장 후 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조화(造花), 다섯째는 분장 후 철분이 많은 안료(顔料)로 무늬를 그리는 철화(鐵畵), 여섯째는 굵은 붓자국으로 자국을 남겨 장식하는 귀얄, 일곱째는 백토 물에 담가서 분장하는 덤벙이다.
이 일곱 가지 기법 가운데 역시 가장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것은 철화, 귀얄, 덤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흥 분청사기는 바로 덤벙기법이 주류를 이루었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기법을 시기별로 보자면 ▲전기(발생기:1360~1420)는 고려청자 상감무늬의 퇴화된 여운과 그 변모 및 인화기법이 발생한 시기고, ▲중기(발전기:1420~1480)는 상감·인화·조화·박지 등 다양한 기법의 분청이 생산된 시기며, ▲후기(쇠퇴기:1480~1540)는 상감·인화 기법의 쇠퇴하고 철화·귀얄·덤벙 분청이 성행했으며, ▲말기(소멸기:1540~1600)는 귀얄·덤벙 분청이 소멸된 시기다.
분청사기를 생산한 가마 가운데 고흥 운대리는 일곱 가지 기법을 모두 이용했지만, 덤벙분청사기는 동반 생산된 다른 기법들에 비해 정교하게 번조한 양상을 보인다. 또한 운대리 한 지역에만 25기에 달하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은 다른 지역 가마터에서는 볼 수 없는 고흥 운대리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랜 세월이 지났고, 전란까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마터로서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들은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는 크게 1기, 2기, 3기로 나뉜다. 1기(15세기 2/4분기)는 관요가 설치(1469년)되기 이전 시기로 공납용 생산이 주로 이루어졌다. 상감과 인철 기법 위주로 제작했고, 후반기에 귀얄과 덤벙이 등장한다.
2기(15세기 3/4분기~4/4분기)는 관요 설치 이후라서 공납용 생산품이 1기보다 감소했다. 인화, 귀얄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철화기법이 등장하며 조화, 덤벙 기법이 크게 증가하는 특징을 보인다.
3기(16세기 1/4)는 공납용 사기 생산 의무가 거의 사라져 가는 시기로써, 생산자 이름을 넣은 명문(名文)자기 제작이 소멸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납이 사라졌음으로 굳이 생산자 이름을 넣을 필요성이 사라진 탓이다. 이 시기 상감, 인화, 철화 등은 대부분 소멸되며 매우 간단한 분장인 귀얄과 덤벙 기법만이 사용됐다. 이 역시 공납 의무가 사라지고 시중 판매만 가능했으므로 공이 과하고 까다로운 노력이 들어가는 기법들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귀얄과 덤벙은 간단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인 해학이 그대로 묻어나는 분장기법으로 당시 대중의 미학적 관점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최순우가 말했던 ‘자유분방하고 수수한 멋’, 버나드 리치가 말했던 ‘속물적 근성이 없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라는 표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고흥 분청사기는 짧은 시간 사라져간 조선 그릇 서민적 해학의 총아라고 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매우 중요한 미술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면 왜 하필 고흥에 분청사기 가마터들이 집중되었을까. 자기를 굽는 데 가장 필요한 요소가 흙과 땔감이라고만 생각하면 이 물음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 조선 초기라면 흙과 땔감을 구할 곳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답은 고흥의 지리적 위치에서 찾아봐야 한다. 지금 대부분 가마터는 고흥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지만, 지금의 위치는 옛 자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 위치는 근현대의 간척사업으로 인해 내륙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으로, 동국여지도를 보면 가마터 대부분이 해안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한양 등에 공납을 위해서도, 남해 일대 연안 지역 판매를 위해서도 배로 쉽게 나를 수 있는 고흥 바닷가 인접 지역에 가마터가 생겨난 것이다. 부산에서도 고흥 분청사기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공납용이 아닌 분청사기는 섬들이 많은 남해안 지역 판매에서 고흥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위치였던 것이다.
2017년에 설립한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은 고흥군 두원면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이다. 1973년부터 1980년 사이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발견한 운대리 도요지에서 2001년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한 성과를 토대로 설립된 박물관이다. 운대리 도요지는 2011년에 사적 제519호로 지정됐다.
지상 2개 층으로 이루어진 고흥분청문화박물관은 건축면적 9723㎡, 부지 총면적 19만2174㎡ 규모다. 박물관 1층에는 상설전시실로 한국의 분청사기, 분청사기실, 역사문화실, 설화문학실과 특별전시실이 위치해 있다.
지역별 도자의 특징을 조망할 수 있는 한국의 분청사기 전시실에서는 운대리 도요지 이외에 철화분청 제작지였던 충남 공주시 학봉리 가마 이외에 전북 고창군 용산리 가마 및 광주시 충효동 가마, 분청사기와 연질 백자가 생산되었던 경남 밀양시 용전리 가마 및 합천군 외사리 가마 등을 소개한다.
분청사기실은 분청사기 제작의 과학적 원리 분석과 분청사기의 7가지 장식 기법을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역사문화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고흥의 지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고흥의 연혁과 인문지리, 고흥의 역사, 불교문화의 중흥, 불교미술과 승장, 흥양수군과 임진왜란 4개 소주제로 구성돼 있다.
설화문학실은 고흥 지역의 대표적인 설화를 소개한다. 박물관 2층은 아시아 도자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아시아 도자실에서는 고군산도 및 신안 해저에서 출토된 중국 송나라(960~1279) 및 원나라(1279~1368) 도자를 통해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살펴볼 수 있다.
분청문화박물관은 지난 9월 13일부터 10월 6일까지 24일 동안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고흥 분청사기 요지–화화(火花) 1250’행사를 개최했다. ‘화(火)’는 ‘불의 신’이라 명명되던 사기장들의 뜨거운 열정과 미디어아트의 강렬한 빛을 의미하고, ‘화(花)’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분청문화를 꽃피운 명작 분청사기를 뜻하며, 마지막 ‘1250이란 숫자는 분청사기를 굽는 가마 최적의 온도 1250도를 나타낸다.
분청문화박물관과 분청사적공원을 ‘박물관존’과 ‘가마터존’으로 나누어 총 13개의 프로그램이 운영됐으며, 분청사기를 재해석한 ▲미디어아트 공모전 작품 ▲최대 규모의 미디어파사드 ▲관람객과 함께 즐기는 전문 안내원(도슨트) 투어와 미디어 고흥 다도 ▲정통 타악과 레이저 쇼가 함께한 융복합 퍼포먼스 ▲형형색색의 경관 조명 등으로 행사장을 찾은 8만여 명 관람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고흥 분청사기 미디어아트 행사는 눈으로 보기만 하는 미디어아트 전시가 아닌, 시각과 함께 청각·촉각·미각·후각 등 다양한 감각으로 분청사기의 세계를 체험하는 다채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 고흥과 분청사기의 문화적 매력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분청문화박물관 바로 옆에는 역시 2017년에 개관한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이 있어 이채롭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의 대하소설로 유명한 한국 문단의 대표 작가 조정래와 ‘떠돌이 별’ ‘사랑굿’ 등으로 이름을 날린 부인 김초혜 시인, 부친 조종현 시인 관련 기록들이 함께 전시된 가족문학관이다. 이렇게 부부와 아버지 작품으로 구성된 가족문학관은 세계적으로 드문 전시공간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 배경으로, 고흥과 인접한 보성군 벌교에도 지난 2008년 ‘태백산맥문학관’이 생겨 운영되고 있지만, 고흥 조정래 가족 문학관은 그들이 사용하던 집필 도구와 차구 등 좀 더 총체적인 조 작가 가족의 문학 세계를 다채롭게 조망할 수 있다.
먹거리에서도 고흥은 결코 빠지지 않는다. 지난 2023년 고흥군은 ‘고흥 9미(味) ▲장어탕/구이 ▲서대회무침/조림 ▲매생이국 ▲삼치회/구이 ▲전어회/구이 ▲모둠 생선 숯불구이 ▲바지락회무침/짓갱(해장국) ▲한우구이를 선정했다.
고흥 대표 농축수산물 8품(品)인 유자, 석류, 김, 미역, 다시마, 굴, 마늘, 유자골한우도 있다.
고흥 유자는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는 대표 상품으로 매년 11월 유자축제가 열린다. 제4회인 올해는 11월 4일부터 7일까지다.
유자가 유명한 만큼 유자 막걸리, 유자 슬러시 등도 유명하고, 최근에는 백종원이 국산 쌀과 유자로 만든 ‘빽하이볼’을 출시했다. 이는 100% 국산 쌀을 사용한 원주에 고흥 유자를 넣은 것으로, 최근 젊은 층의 하이볼 인기 속에서 국산 재료를 활용한 이색 하이볼로 차별화를 꾀했다.
고흥에 들르면 꼭 먹어봐야 후회하지 않는 유자 디저트의 명소는 세 군데가 있다. 먼저 바다 곁 녹동항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 ‘유쟈(UZZA)’(도덕면 학동 1길 15)는 거르면 매우 아쉬울 곳이다. 젊은 사장의 감각으로 앙증맞게 제작한 캐릭터와 인테리어, 유자 디저트 및 음료들로 많은 여행객을 불러 모은다. 특산물 유자를 활용한 다양한 메뉴를 맛보면서 여행 기념품으로 사갈만한 소품까지 구경할 수 있다. 유자스무디를 비롯해 유자에이드, 유자스콘, 유자라테 등 유자를 활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인다.
고흥 중심 고흥읍에는 유자를 활용한 각종 빵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유자당’(고흥읍 여산당촌길 50-1)이 있다. 베이커리 카페인 ‘유자당’에서는 유자의 상큼함이 버무려진 머핀, 휘낭시에, 꽃빵, 쿠키, 크럼블 등 각종 디저트를 즐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흥을 빠져나가는 마지막 장소인 만남의 광장에는 ‘유자씨의 하루’(동강면 고흥로 4797)가 있다. 고흥 여행을 마치고 기념품이나 지인 선물로 살만한 것을 찾는다면 유자빵을 만드는 이곳으로 향해보자. 낱개 포장된 유자빵을 박스에 담아 판매하고 있어 기념품으로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