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콩쿠르 영광 안겨준 클라리넷 협주곡
12월3일 직접 지휘로 제롬 콤테와 다시 연주
사이먼 래틀·파보 예르비 등과 끈끈한 인연
슈만·멘델스존 등 고전음악 지휘에 더 매진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12월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우승곡을 7년 만에 다시 연주합니다. 뒤늦은 두 번째 연주이기에 소중합니다. 더욱이 ‘BBC 프롬스 코리아’ 무대를 통해 앙상블 버전을 세계 초연하게 돼 설렙니다.”
작곡가 겸 지휘자 최재혁(1994년생)의 이름 석 자를 알린 결정적 계기는 2017년 11월에 열린 ‘제72회 제네바 국제 콩쿠르’ 작곡 부문 최연소(23세) 우승이다. 이때 1위를 안겨준 곡이 클라리넷 연주자 제롬 콤테와 협연한 ‘클라리넷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녹턴 III’다.
영광의 곡이지만 이 클라리넷 협주곡은 콩쿠르 이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기회는 있었다. 2020년 12월 파리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현대음악단체 ‘앙상블 앙텡콩탱포랑(The Ensemble Intercontemporain)’이 마티아스 핀처의 지휘로 선보일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팬데믹 탓에 물거품이 됐다. 우승 당시의 오케스트라 버전을 제롬 콤테에게 헌정하는 앙상블 버전으로 바꿔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나 아쉽게 무산됐다.
최재혁이 ‘7년 묵은 응어리’를 풀게 됐다. 오는 12월 3일(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BBC 프롬스 코리아에서 앙상블 버전 클라리넷 협주곡을 처음 선보인다. 최근 데일리한국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동안 국내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어 속상했는데 이렇게 훌륭한 BBC 프롬스를 통해 처음 공개하게 돼 영광이다”라며 “앙상블 블랭크(Ensemble Blank)의 연주와 제롬 콤테의 협연으로 제가 직접 지휘까지 하게 돼 더없이 기쁘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국내에서 첫 시도되는 BBC 프롬스 코리아(12월 2~8일)는 영국 BBC 프롬스와 협업을 통해 진행되는 특별한 음악 축제로 국내외 최정상 아티스트들이 출연한다. 스코틀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바이올린 이지윤, 첼로 최하영·한재민, 바리톤 김태한 등이 무대에 선다.
롯데문화재단은 컨템포러리(현대) 음악 분야에서 독자적인 해석력을 인정받은 지휘자 최재혁과 그가 이끄는 앙상블 블랭크를 초대했다. 앙상블블랭크는 사티에, 버트랑 등의 현대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예술 분야와 컬래버하는 특별한 공연을 선사한다.
최근 최재혁의 활약은 눈부시다. 먼저 지난 7월 ‘제6회 부쿠레슈티 국제 지휘 콩쿠르’ 3위에 올랐다. 그동안 세미파이널(2021년 프린세스 아스트리드 국제 지휘 콩쿠르)과 파이널(2022년 쿠세비츠키 지휘 콩쿠르) 진출에 머물렀지만 이번에 당당히 수상했다.
부쿠레슈티 콩쿠르에서는 차이콥스키의 곡으로만 세 차례 본선을 치렀다. 연주해야 할 7곡을 미리 알려줬다. ‘테스트 범위’를 공지했지만 협주곡의 경우 대개 3악장이고, 교향곡은 대부분 4악장이니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어떤 것을 연주할지는 제비뽑기로 정했다,
“1라운드에 주어진 시간은 6분이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서곡을 뽑았죠. 20분짜리 곡을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악보를 고치거나 리허설은 꿈도 못 꿉니다. 곧바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습니다. 대충 시간을 계산해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파트를 고른 뒤 연주했어요. 말은 한만디도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지휘했어요.”
2라운드는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을 뽑았다. “협주자와의 연주가 가장 어렵다”라며 “협주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오케스트라는 거기에 맞춰 따라가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힘이 들었다”고 밝혔다. “모두 10명이 겨뤘는데 오케스트라가 너무 잘해줘 무사히 마쳤다”며 살짝 진땀도 흘렸다고 덧붙였다.
6명이 진출한 파이널 경연곡은 교향곡 6번 ‘비창’. 또 2악장이 걸렸다. “왈츠 리듬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며 “3등은 아쉽지만 이것을 발판 삼아 나중에 더 잘해야지 마음을 다졌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최재혁이 지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초등학생 때 빅히트했던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영향이 컸다. 해리포터가 휙휙 휘두르는 마술 지팡이에 홀딱 반했다. 커서 마술사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였다면 누구나 가져본 로망이다. 그런데 점점 그 마술 지팡이가 지휘봉과 똑같은 것이 됐다.
“유소년 오케스트라에서 퍼스트 바이올린을 맡았어요. 6학년 때였죠. 악보를 보면 작곡가 이름이 나오고, 또 포디움을 쳐다보면 지휘자가 보이잖아요. 이 두 사람에게 꽂혔어요. 작곡과 지휘, 두 가지를 모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모차르트를 연주했는데, 얼핏 보면 모차르트 곡이 좀 간단해 보이잖아요. ‘나도 모차르트처럼 해볼 수 있겠는데’라고 왠지 자신감이 생겼어요. 또한 지휘자도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해리포터 마술 지팡이를 닮은 지휘봉에서 눈을 못 뗐어요. ‘이것 역시 충분히 해볼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했죠.”
마음이 쏠리니 자연스럽게 많은 음악을 찾아 들었다. 어머니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중요 역할’을 했다. “CD를 사려면 ‘노랑 딱지’를 사야한다”고 조언해 준 것.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발매한 앨범을 들으며 카라얀과 번스타인 등에 푹 빠졌다. 총보(score)라는 것도 알게 됐다. 중학 1·2학년 때 교보문고에 가서 악보를 보면서 총보 읽는 법을 공부했다. 조숙했다고 할까. 흉내 내며 따라하다 보니 작곡을 하게 됐다.
그는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할 당시 저희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우리나라 대학에는 따로 지휘과가 없으니, 작곡 먼저 해보고 나중에 지휘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해줬다”라며 “그래서 ‘선작곡 후지휘’로 방향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른 나이에 인생 마스터 프랜을 세운 셈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앙상블 블랭크의 탄생과정도 재미있다. 2015년 창단 후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자거나 와인을 마시는 등의 획기적인 무대 연출과 탁월한 현대음악의 해석으로 주목받고 있는 현대음악 전문 연주단체다.
최재혁은 미국 월넛힐 예술고등학교 졸업 뒤 줄리어드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배우는 것은 많았지만 한계도 있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겠지만 미국에서는 좀처럼 찬스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게 ‘그러면 우리가 직접 공연을 만들어보자’였다.
“먼저 팀명이 필요했어요. 막상 이름을 만들려고 하니 생각보다 어려웠죠. 많은 팀명이 나왔는데 딱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 없었어요. ‘앙상블 ( )’라고 적어놓고는 어떤 이름을 채울까 사나흘 고민하다가 번뜩 그럼 ‘블랭크’로 하자라고 결정했어요.”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음악활동을 하자고 시작했지만 조직이다보니 누군가는 ‘조정자’ ‘결정자’ 역할을 맡아야 했다. 공연 하나 하려면 돈이 쏠쏠하게 든다. ‘맨땅에 헤딩’을 선택했다. 직접 정성스럽게 손편지를 썼다. 한국에 있는 여러 공연장에 레터를 보냈다. “저희는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연은 하고 싶습니다. 음악홀을 빌려 주시면 정말 잘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적어 발송했다.
결국 문이 열렸다. 2015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2016년 서울 한남동 일신홀이 기회를 줬다. 최재혁은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젊은이들의 간청에 귀 기울여준 덕분에 앙상블 블랭크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재혁은 지금도 끊임없이 두드린다. “무작정 메일을 보내 저와 앙상블 블랭크를 소개하는 일은 민망하기도 하지만, ‘한번 해보자, 아니면 말고’라는 도전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작곡하고 지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대음악 단체로 이름이 알려지게 됐어요. 초창기엔 그냥 맛보기로 현대곡을 한두 곡씩 끼워 넣었을 뿐인데, 1년~3년 하고 없어지는 단체가 워낙 많았어요. 경쟁력을 가지려면 현대음악을 해야겠구나 마음먹다보니 어느새 현대음악 전문단체가 되었어요.”
지휘에 눈을 뜬 사건은 2018년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이다. 루체른 페스티벌은 기본적으로 현대음악을 다루는 축제다. 앙상블 블랭크의 그동안의 활동 내용을 정리한 동영상을 첨부해 지원했다. 최재혁의 이러한 어플라이(apply)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작곡도 좋았지만 내 작품이 실제 소리로 구현되는 순간에 더 큰 희열을 느끼는 점도 한몫해 지휘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루체른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는 사이먼 래틀, 던칸 와드, 마티아스 핀처 등 거장 3명이 동시에 한 무대에 올라 3개의 오케스트라를 나눠 지휘하는 슈톡하우젠의 ‘그루펜(Gruppen)’ 연주였다. 최재혁은 핀처의 부지휘자 역할을 맡아 어시스트했다.
“공연 3일전 핀처가 갑자기 지휘를 못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비밀이에요. 저도 정확한 원인은 몰라요. 당장 내일 리허설을 해야 하는데 지휘자가 없어졌으니 난감했죠. 그렇다고 스물네 살 부지휘자 최재혁을 무대에 올릴 수는 없잖아요. ‘애’에게 맡기기엔 모험이었을 거예요.”
주최 측은 서둘러 현대음악 경험이 있는 지휘자를 섭외했다. 대타가 루체른으로 날아왔다. 오전에 리허설을 했는데 래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래틀은 “재혁, 오후엔 네가 해봐라”라며 파격 제안을 했다. 리허설을 보고는 결국 최재혁으로 낙점됐다. 그래서 전설들과 함께 포디움에 서는 엄청난 행운을 잡았다. ‘깜놀 사건’이었다.
래틀을 사로잡은 비결은 철저한 분석과 준비였다. 최재혁은 “다른 일정도 있었는데 석 달 전부터 꾸준하게 몸과 정신을 만들었다. 공연은 9월 말인데 8월 중순부터 루체른으로 날아와 대기했다”고 밝혔다. 결국 루체른이 최재혁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후 부천시향, 대전시향 등의 러브콜을 받으며 국내 무대에도 얼굴을 알리게 됐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밤새워 공부했어요. 공연을 마치자 래틀은 ‘너무 좋았다. 계속 나하고 소통하자’고 말했어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한국 공연 때도 찾아가 뵙고 인사도 드렸어요. ‘이런 학교가 있는데, 여기서 공부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라며 조언도 해줬어요.”
파보 예르비와의 만남도 래틀의 소개 덕이다. 래틀은 예르비가 진행하는 지휘 마스터클래스와 ‘패르누 뮤직 페스티벌’에 참여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어드바이스했다. 최재혁은 어플라이했고 초대를 받았다. 2022년 7월이다. 에스토니아의 휴양지 패르누에서 열린 이 페스티벌은 세계적 거장인 네메 예르비와 그의 두 아들인 파보 예르비·크리스티안 예르비가 주축이 돼 진행되는 축제다. 최재혁은 “네메가 파보를 가르치는 광경이 너무 신기했다”고 추억했다. 최재혁은 예르비 아카데미 유스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지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인연은 11월에 다시 이어졌다. 파보는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니, 지휘 마스터클래스에 응모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파보는 젊은 지휘자를 대상으로 지휘 아카데미를 진행했는데, 전 세계에서 지원한 278명의 지휘자 중 그가 직접 선택한 6명에 선발돼 무대에 섰다. 6개월 새 두 번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잡았다. 사흘 동안 레슨을 받았고 마지막날 클로징 공연에서 지휘를 했다.
“파보 예르비는 지휘할 때 말을 많이 안해요. 저에게 늘 ‘손으로, 표정으로, 바디랭귀지로 말해라. 만약 말로 한다면 짧게, 효율적으로 해라. 테크닉으로 다 풀어나갈 수 있다’라고 팁을 줬어요.”
그해 12월 도이치캄머필 내한공연 때 파보의 보조지휘자를 맡았다. 사이먼 래틀과 파보 예르비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으니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래틀은 공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사적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갈 여유를 안남겨요. 소통도 주로 이메일로 해요. 매니저가 대신 답장을 해줄 때도 있어요. 이에 반해 예르비는 주로 페이스북 메신저로 대화합니다. 사적으로 품어주는 스타일이죠. 리허설을 따라가면 중간 15분 정도 쉴 때도 방으로 오라고 해 왜 거기서 느리게 연주했는지 알려주곤 해요. 친근감 넘치는 인물입니다. 여기저기 추천도 많이 해주고요. 그리고 예르비는 항상 밥값을 내요.”
최재혁은 자신을 향한 불편한 시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세상 모든 소리는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훌륭한 자양분인데, 마치 현대음악만을 신봉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혔다며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지난 8월 앙상블 블랭크의 ‘작곡가는 살아있다’ 시리즈 3탄에서도 난해한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바흐의 ‘브란텐부르크 협주곡 4번’을 프로그램에 넣었다. 결국 모든 음악은 저 멀리 바흐에서 파생됐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듯한 구성이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최재혁의 요즘 관심사는 슈만과 멘델스존 등의 고전음악이다. 또한 지금까지 ‘선작곡’에 매진했다면 앞으로는 ‘후지휘’ 쪽으로 무게의 추를 옮겨보겠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현대음악만 하면 재미없고, 역시 고전음악만 해도 재미가 없어요. 옛것과 새것의 조화가 저의 모토입니다. 작곡이 혼자 상상을 펼치는 고독한 작업이라면, 지휘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호흡하는 협업의 작업입니다. 내년이 앙상블 블랭크 10주년입니다. 계속 모험도 즐기겠지만 전통적인 고전의 본질에도 더 몰두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