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제공
사진=작가 제공

내게는 다섯 살 위인 오빠와 여덟 살 아래인 남동생이 있다. 터울 때문이었을까. 어렸을 적 우리는 꽤 살갑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열 살쯤 되던 해, 오빠는 약국과 가축병원을 하는 외갓집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가 빠져나간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형제가 많은 집 애들하고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오빠가 더욱 생각났다. 그러나 보니 어쩌다 동생이 울고 들어오기만 해도 나는 악착같이 누나 몫을 톡톡해 해내려고 애를 썼다.

커갈수록 오빠의 빈자리는 더 크게 느껴졌고, 어느새 그리운 사람이 되어있었다. 방바닥에 엎드려 아버지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던 편지는 어느새 속내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집안일에서부터 마음속 고민까지 오롯이 둘만의 비밀로 돈독해져 갔다.

"사랑하는 내 동생 보아라!"로 시작되는 편지는 뜨거운 눈물을 고이게 하였다. 편지에는 아버지의 병환이 어떤지로 시작하여 집 걱정으로 가득했다. 오로지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 잘 도와드리고, 동생 잘 보살피라는 당부가 전부였지만, 간간이 그 속엔 용돈으로 쓰라며 소액환도 들어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도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는데, 나는 태산 같은 존재로 여겼으니 오빠도 꽤 부담이 아니었을까.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는 시기는 방학이었다. 명절에는 오빠가 집에 오고, 방학 때는 주로 내가 가는 편이었다. 한번 가면 사나흘은 지내다 왔는데, 그 일은 내게 있어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가장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오빠를 만나려면 직행 버스를 타도 네댓 시간은 덜컹거리고 가야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릴 때는 멀미로 고통스러웠지만, 그쯤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차 밑에선 자갈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고, 견디다 못한 돌멩이는 밖으로 튕겨 나가기도 했다. 가파르고 아슬아슬한 고갯길을 넘을 때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두 눈을 질끈감곤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다 보면 홍천에 다다라 외갓집 약국 앞을 지나 터미널에 닿았다. 그 앞을 지날 때는 창문에 바짝 붙어 혹시, 오빠를 볼 수 있을까 목을 길게 빼고 내다보곤 했다.

그렇게 만난 우리 남매는 처음에는 마음과 다르게 다소 멋쩍어했다. 쑥스러워하면서 데면데면한 얼굴이었지만, 외갓집 식구들과 인사하고 둘이 있는 시간이면 나는 오빠 앞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고, 오빠는 집 소식을 묻고 또 물으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집이 그리웠으리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 친구들 안부를 물을 때는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아버지의 병이 나날이 깊어지는 것 같다는 말에는 얼굴이 굳어졌다. 순간 둘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숨조차 크게 쉬기 힘들었다. 고개 푹 숙인 오빠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 보였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남매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서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 오빠는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시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집에 보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내 것은 주로 옷이었는데, 맘에 든다는 게 있을 때까지 몇 바퀴건 돌면서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깔깔거리다 보면 우리가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은 금방 찾아왔다. 내가 떠나는 날은 더 분주했다. 오빠는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끊고 좌석을 찾아 나를 앉히곤 군것질거리며, 집에 가져갈 짐들을 꼼꼼히 챙긴 뒤에 버스에서 내렸다.

차창 밖에서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오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런 오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마 오빠도 이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싶을 거였다.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그러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멋쩍으면 간간이 손을 흔들며 버스가 떠나가기를 기다렸다. 나도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고 오빠의 손짓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으라는 말은 소리 없이 입으로만 뻐금거렸다. 

가슴이 울컥거리고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 울컥거림을 꾹 누르면 찝찔한 눈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것이 반복되다가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나는 커튼 뒤로 얼굴을 감추었다가 다시 오빠를 훔쳐보았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오빠도 자전거를 타고 버스 꽁무니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버스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뽀얀 먼지가 풀풀 거리는 신작로를 정신없이 쫓아오다가 더 쫓아갈 수 없게 되면, 그제야 자전거를 세우고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나는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오빠를 바라보며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눈물은 흐느낌으로 변했고, 오빠도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음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다시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우리 남매는 왜 그렇게 매번 서글퍼 했는지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오빠의 얼굴엔 아직도 어린 날의 수채화 같은 모습들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 슬퍼했던 이별을 오빠가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시리게 빛나는 겨울 달빛 같은 시절로 남아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제목을 단 한 폭의 수채화로 시들지 않는 꽃으로 내 가슴속에 피어있다. 

전수림 숲ㄹ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전수림 숲ㄹ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전수림 주요 약력

△강원 양양 출생 △ '예술세계' 등단(2001)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리더스에세이 편집주간 △제6회 전영택문학상. 제31회 한국수필문학상. 제1회 리더스에세이 여행작가상.  제4회 인산기행수필 문학상 △수필집 '비 오는 날 세차하는 여자' '아직도 거부할 수 없는 남자' '엄마를 사고 싶다' '떠남' '서쪽에 걸린 풍경' '떠남Ⅱ'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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