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령 스페셜앨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2013년 5월 12일 작업실
지난해 봄. 화가이자 싱어송라이터인 황보령이 난지도 공원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촬영했었다.

해가 슬그머니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붓 소리는 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지며 담백한 노래가 되었다. 그때, 무심코 한마디를 던졌다.

2013년 5월 12일 난지도 공원
"그림 한 점을 완성하면 그걸 노래로 풀어내는 그림노래 앨범을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떠냐?"고. 특유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응답했었다. "음악과 동영상을 보여주는 VJ들은 소리에 강약 멜로디 흐름을 이미지로 보여주지만 저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라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가만 있는 그림에서 소리가 들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황보령)

10개월 만에 그녀는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음악 쇼케이스 'SXSW'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이란 리포트를 제출했다. 황보령은 작년 9월부터 6회에 걸쳐 어쿠스틱 스페셜앨범 쇼케이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을 개최했다. 앨범에 실릴 한 곡씩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바로 그림 한 점이 완성된 후 만들어진 노래그림들이었다. 그렇게 6곡의 노래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녀의 창작 방식은 단순하다. 의도적으로 곡을 만들기보단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해 놓고 도화지에 코드를 적어서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즉흥방식이다. "저는 노래나 그림 작업할 때 멜로디와 가사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생각은 오래하지만 작업은 굉장히 짧고 빨리 하는 편입니다. 일단 시작하면 한두 달에 곡 작업과 녹음을 끝내는 스타일입니다."(황보령)

처음 그녀가 완성한 그림은 함께 살고 있는 페르시안 고양이와 자신을 그린 '바우와 나'였다. 이번 앨범에 4번째 트랙으로 수록된 '곤양이 노래(Cat Song)'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바우가 막 뛰어다녀서 발자국이 나 있어요. 고양이와 제가 함께 그린 거죠(웃음). 20분 만에 완성하는 빨리 그리는 그림이 있고 몇 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는 것도 있어요."(황보령)

그녀는 음악이 그림으로 보여지고 그림이 소리로 들려지는 실험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저는 곡 작업을 하면 소리로 허공에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붓을 따라 '쉬익'하고 소리를 내며 작업하죠. 일단 이번 앨범은 밝은 분위기로 가려 해요. 노래는 어둡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제 스스로 그림을 어둡게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황보령)

아날로그적인 '그림 노래'라는 특성상 이 앨범은 펑크적 질감이 아닌 어쿠스틱 사운드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황보령은 황보령이다. 이미지를 던지는 그녀 특유의 화법은 공기에다 붓질을 하는 것처럼 사각대는 느낌으로 청자의 마음을 끊임없이 이완시킨다.

이 앨범은 모든 곡이 피처링으로 이루어졌다. Rainbow99, 서진실, 조용민, 정현서, 진선, 작곡가 방승철, 타악기 연주자 원일, 싱어송라이터 무중력소년, 피아니스트 장경아, 첼리스트 이지영,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송은지, 한희정의 이름도 보인다. 이들의 흔적은 노래마다 적절하게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마법의 유리병'은 북과 카혼의 울림 사이에서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황보령의 중저음 절규에 스리살짝 섞여 들어오는 한희정의 맑은 목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안겨 준다. 실로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의 승리다.

작곡가 방승철이 선물한 첫 트랙 '매일 매일 매일'에서 황보령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순수의 결정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에서는 장경아의 맑고 슬프면서도 풍성한 피아노 선율이 그녀의 보컬에 향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곡은 언어유희가 빛나는 ('아저-씨발-냄새나')와 송은지의 코러스가 묘한 감흥을 안겨주는 '밝게 웃어요'다.

이 노래를 듣고 배꼽이 실종되었다. 이번 앨범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참으로 황보령스럽다. 익숙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황보령의 작가주의는 이미 한국대중음악의 하나의 갈래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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