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 '작은 거인' 김수철 데뷔 40주년 공연, 세월을 뛰어넘는 열정의 무대

가수 김수철이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그는 지난 6월 13일 오후 8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영원한 젊은 그대!’라는 이름의 생애 첫 단독공연을 성황리에 끝냈다.

“지난 30년 동안 저를 사랑해주신 분들 덕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관객의 열띤 분위기에 시종 고무된 표정의 김수철은 ‘못다 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등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히트곡은 물론, 신명나는 전자기타 산조에 자신의 음악 혼을 담아 원 없이 객석으로 토해냈다.

김수철은 특유의 신나는 노래와 파격적인 무대 매너로 7080콘서트의 오프닝 가수 1순위로 통한다. 그만큼 객석의 분위기를 열광적으로 몰아가는 면에선 최고의 선수란 얘기다.

그의 30주년 기념공연의 관객층은 20대부터 70대까지 광범위했다. 가수뿐 아니라 영화음악감독, 연기자로도 재능을 발휘한 활동 반경 때문에 이날 객석에는 양희은, 김세환, 김종서, DJ doc등 가수 외에도 앙드레 김, 안성기, 송승환, 박중훈, 강석우, 윤다훈 등 낯익은 연예인들로 북적거렸다.

30년 음악 인생을 담은 동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국민배우 안성기가 등장해 김수철을 소개했다. 두 사람은 1984년 공전의 인기몰이를 한 영화 <고래사냥>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다.

안성기는 “김수철의 옛날 화면을 보니 옛 생각이 난다. 30년 가까이 우리 두 사람은 형과 동생으로 지내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김수철과 함께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가늠해 보자”고 축하메시지를 던졌다.

50을 넘긴 중년의 그지만 무대 위에선 여전히 만년 개구쟁이 모습 그대로다. 깡충깡충 발차기하며 뛰는 장난스런 동작과 스피디한 기타 실력, 그리고 친근감과 진지함을 동시에 안겨주는 그만의 무대 매너 또한 여전했다.

사실 명색이 30주년 기념공연이니 요즘 유행하는 레이저 광선이 난무하고 사람이 날라 다니는 특수 조명이나 첨단 장비로 꾸며진 화려한 무대를 생각했었다.

헌데 변변한 세트조차 없는 무대임에도 3,000여 관객들은 그의 음악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했다. 나무자전거, 해바라기, 한대수의 게스트 라인업도 좋았지만 국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진 스페셜 게스트들의 무대는 압권이었다.

김수철은 박용호 교수와 함께 영화 <서편제>의 천년학(대금곡)과 소리길(소금곡) 연주를 선보였고, 사물놀이의 달인 김덕수와 기타 산조로 온몸을 들썩거리게 하는 흥겨운 한마당을 연출했다.

서양 악기인 전기기타로 우리 가락인 산조를 연주한 김수철의 음악은 국악의 세계화를 외치는 그의 음악적 결정체이다. 김덕수는 “같은 음악가의 입장에서 봐도 가장 한국적인 색깔과 멋과 맛으로, 모든 음악을 개발하고 만들어온 김수철은 대한민국이 자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음악 괴물”이라고 추켜세웠다.

관객 박명숙 씨는 “사실 CD로 들었을 땐 김수철 씨의 요즘 음악이 어렵게 느껴졌는데, 직접 들으니 얼마나 신명나던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습니다”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날 객석을 가득 메운 중년 팬들이 “앙코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내자 김수철은 “글루코사민을 먹는 우리 세대가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조용필과 더불어 ‘작은거인’이란 애칭을 지닌 김수철. 젊은 세대는 그를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치키치키 차카차카’를 작곡하고 부른 가수로 기억한다.

그는 1983년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KBS 가수왕을 비롯해 무려 16개의 대중가요상을 휩쓴 인기 정상의 가수였다. 천재 뮤지션으로 불리는 그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 소리의 세계화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천재요? 정신연령이 낮고 철이 없는 거죠. 좋게 말하면 천진한 거고. 30년이 후딱 지나갔어요. 저도 이제 50이 넘기고 보니 관절이 안 좋아 예전 같지 않네요.”

80년대의 김수철은 요즘의 ‘비’에 견줄 만했다. 용산공고 1학년 때 록밴드 ‘파이어 폭스’를 결성했던 그는 고3 때 명동성당에서 최초로 록 공연을 연 괴물 고교생이었다.

1977년 대학신입생 때 종로 YMCA 강당에서 록그룹 ‘퀘스쳔스’의 발표회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 KBS 라디오 <젊음의 찬가> 프로에 출연해 창작곡 ‘내일’ 등 네 곡을 불렀다. 첫 방송출연이었다. 1979년 한양대에서 열렸던 제1회 전국 대학가요 경연대회.

록그룹 작은거인의 리더로 출전해 동요 풍의 밝은 곡 ‘일곱 색깔 무지개’를 하드 록 사운드와 깡충깡충 뛰며 기타를 연주하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객석을 뒤집어 놓았다. 결과는 금상 수상.

TBC TV를 통해 이 모습이 소개된 후 방송출연 요청이 쇄도하며 대학가 최고 인기스타로 수직 상승했다. "당시 기타에 흠집을 낼까봐 벨트를 옆으로 맨 것도 젊은 층에 곧바로 유행이 되었어요."

솔로 가수로 독립한 그는 ‘못다 핀 꽃 한 송이’,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 ‘내일’, ‘정녕 그대를’, ‘왜 모르시나’, ‘정신 차려’ 등으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는 결국 가수왕에까지 등극했다.

국악은 그에게 영욕을 함께해준 음악이다. “20년 전 발표한 국악음반이 575장밖에 팔리지 않아 1억원 정도 빚을 떠안았죠. 1주일 뒤에 레코드회사로부터 음반 폐품처리 통보를 받았을 때 정말 상처를 받았어요.”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김수철 국악 3부작 앨범을 계속해 발표하며 한우물을 팠다. 이에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전야제를 시작으로 1991년 세종문화회관 남북문화예술인 음악회에선 쟁쟁한 인간문화재들과 함께 기타산조를 멋들어지게 연주해 결국 대중음악계와 더불어 국악계로부터도 인정을 받아냈다.

이후 국가대표급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 2002한일 월드컵 개막식, 뉴욕 유엔본부에서 유엔의 날 기념 특별연주 등 각종 국내외 행사는 물론 영화 <서편제>, <태백산맥> 등 20여 편의 영화 음악으로 국악의 대중화에 혼신의 힘을 다해 왔다.

“영광스럽게도 수많은 국가 행사의 음악을 작곡했지요. 어차피 영원한 인기는 없어요. 내가 하는 음악에 최선을 다할 뿐 인기에 영합하는 음악을 만들 생각은 없어요.

지구촌 사람들을 감동케 하는 우리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제 꿈입니다.” 김수철은 이날 공연이 “끝이 아니라 제 2막의 시작”이라며 중단 없는 음악인생을 다짐했다. 아직도 이루고 싶은 꿈이 너무 많은 그는 ‘젊은 그대’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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