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미숙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 DB
서미숙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 DB

담장 아래 상사화가 손톱을 내민다. 다시 봄이다. 꽃샘바람이 널뛰기하고 봄눈이 공중그네를 타도 봄은 오고야 만다. 학교마다 풋풋한 새내기를 맞이하고, 의젓해진 상급생도 새로운 시작으로 설레는 시기다. 

삼월이면 학창 시절이 생각나게 마련이다. 그때는 새 학년 새 학기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학급담임을 발표했다. 한 분씩 호명할 때마다 학생들의 환호와 한숨이 엇갈렸다.

최근에 여고 선배를 만났다. 그녀는 여고 시절에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헤어나기 힘들었다고 한다. 출석부로 머리를 때리는 담임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숙하게도 쇼펜하우어, 니체, 사르트르 등 철학자들과 톨스토이에게 심취해 시험공부도 안 하고, 수업 시간에도 엉뚱한 책을 읽었다.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학생 카드에 장래 희망을 거지라고 써놓았다. 거지는 자유로우니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앞날을 어떻게 개척해야 하는지, 넓은 세상을 내다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멘토가 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선배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여 교대에 진학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간 것은 아니었다. 교사가 되고부터는 책임감으로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이제는 학교에서 학생들의 성향에 맞는 개별지도와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시스템을 만들어 신입생들에게 꼭 해야 할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교사 출신 또 다른 지인이 떠올랐다. 그는 재직시절 학년 초가 되면 담임 맡은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담임으로서 일 년 동안 어떤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대할 것인지,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았다. 아울러 자신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고 낮추며 인간적으로 다가서는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교사의 눈은 자애로운 눈빛이어야 하며, 교사의 귀는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교사의 입은 평온함과 다정함을 주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소박한 신념으로 삼고 생활하리라"라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교사로서 자신과의 약속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그런 담임을 만난 학생들은 참 복이 많다 싶었다. 갈팡질팡하는 청소년기에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길잡이가 되어주는 스승이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한 일이다. 학부모의 만족도는 높을 수밖에 없으리라. 

진정성은 통하게 마련이다. 언젠가 말썽부린 제자를 회초리로 때리고는 마음 아파서 짜장면 사주며 달래기도 했다.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 시간이면 남선생이 외모에 관심 많은 학생을 위해 세안법, 화장법 등을 소상히 일러주며 잠을 깨웠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퇴직 후에도 졸업생들과 소통하며 자주 만남을 갖는다. 이제는 복 많은 스승이 된 셈이다.

내게도 그런 스승이 계셨다. 고3 때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야간자습 시간에도 손수 만든 영문법 괘도를 넘기며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애를 쓰셨다. 덕분에 우리는 등교 시간에 가파른 학교 언덕을 오르면서도 한 손에는 책가방, 다른 손에는 영어단어·숙어를 메모한 독서 카드를 들고 다녔다. 

손때묻어 나달거리는 독서 카드는 아직도 옛 기억을 소환하며 책장 구석에 자리한다. 가끔은 학업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화두를 툭 던지기도 하셨다.

어느 종례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칠판에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돼라'라고 분필로 커다랗게 적어놓았다. 진지하게 말씀을 이어가셨지만, 세월이 흘러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흐릿하다. 성현의 명언보다 더 솔깃했던 그 화두는 살면서 이따금 곱씹게 된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돼라'라는 말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리라. 누군가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어야겠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역지사지 입장에서 상대를 배려해야 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것이나마 실천하는 삶이어야 할 터이다. 

졸업 후 이듬해 담임 선생님을 찾아뵌 게 마지막이었다. 사는 게 뭔지, 평소에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해서 이제는 소식이 묘연하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무수한 이름들, 그중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연 나는 누군가가 기억하고 싶은 사람일까. 환하게 미소 짓던 고3 담임이 그리운 봄날이다.

◆ 서미숙 주요 약력

△경북 안동 출생 △계간 '문장'(2015) 등단 △수필집 '남의 눈에 꽃이 되게' 기행수필집 '종점 기행'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프리랜서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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