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니 뺀 그의 입이 헤벌쭉하다. 저녁 식탁에 도토리묵이 올랐다. 그는 양푼에 윤기 흐르는 도토리묵과 밥 한 공기를 투척한다. 상추 뜯어 넣고 고소한 양념장을 듬뿍 끼얹는다. 김 가루와 계란프라이까지 곁들여 쓱쓱 비벼 먹는다. 도토리묵무침이라면 평소에도 무조건 좋아했지만. 임플란트하려고 기다리는 지금은 장모님 표 진짜배기에 더욱 감읍할 수밖에.
낮에 식당에서 마주한 엄마가 떠오른다. 구운 고기는 연신 내 접시로 갖다 놓기만 한다. 백김치를 좋아하셨는데 그마저 잇몸이 아프다며 한 수저 들다 만다. 엄마도 좀 드시라며 서로 접시를 채워주느라 부산하다.
친정에서 식당까지는 내 걸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구십 바라보는 노인이 맨몸으로도 힘들 터인데 양손에 짐을 들고 시내까지 걸어서 왔단다. 평소에도 체력이 나보다 나은 엄마였지만, "이젠 힘이 할 수 없다" 하면서도 마음은 한창이다. 돌아갈 때는 차 타고 가시라 해도 소화 시켜야 한다며 또 걸어간다.
엄마는 점심 식사보다 보따리 전해주는 게 목적이었나 보다. 손가방엔 두툼한 도토리묵 두 모, 쇼핑백엔 아파트 인근 텃밭에서 손수 가꾼 청·홍 풋고추 두 봉지, 구멍 숭숭한 열무 한 줌이 들어 있다. 엄마 정성까지 덤으로 보태어 보따리가 묵직하다.
장날 시장 갔다가 도토리가 보이길래 두 되를 샀노라고. 그걸 돌돌이에 싣고 곧장 방앗간에 가서 빻았단다. 집에 가자마자 망사주머니에 담고 치대어 껍데기를 골라내고 큰 그릇에 하룻밤 가라앉혔다. 다음날 다시 체에 걸러서 묵을 쑤었단다. 저어주면서 농도를 봐가며 물 조절을 잘해야 탱글탱글 탄력 있는 묵이 된다고 일러 준다.
해마다 가을이면 도토리묵 만들어 나눠 먹는 게 엄마 즐거움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뒷산을 오르내리며 도토리를 손수 주웠다. 이젠 산에 오르기 힘드니 도토리 가루를 사거나 시장에서 한 모 사드셔도 될 터이지만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내 손으로 못하면 이걸 누가 해주겠냐고, 내년에는 못할지도 몰라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요즘 《제철 행복》이 대세다. 김신지 작가는 이 계절에 무얼 하고 싶은지, 미루지 말고 챙겨야 할 기쁨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피면서 지낼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해마다 설레며 기다리게 되는 당신만의 연례행사가 생기기를 주문한다.
입춘에는 지치지 않는 희망을, 입하엔 산에 들에 핀 하얀 꽃을, 추분엔 계수나무 향기를, 상강 무렵엔 막바지 단풍 보러 남쪽으로 기차여행 떠나기를 숙제로 내주기도 한다.
이렇듯 절기의 뜻을 새기면서 촘촘하게 살면 행복해질 기회가 스물네 번이나 오게 된다고. 제철 음식뿐만 아니라 제철 장소, 제철 만남, 제철 선물, 제철 여행... 무수한 제철 기쁨이 넘친다. 각자 좋아하는 것에 제철을 붙이기만 해도 사는 게 즐거워질 것이라니.
이제 엄마에겐 좋은 옷도, 멀리 가는 여행도 부럽지 않다. 가을바람 불면 쌉싸름한 도토리묵, 겨울이면 살얼음 끼는 안동식혜, 봄이면 눈가루에 굴린 듯한 쑥버무리, 여름이면 매콤한 고추장떡 챙겨 드시는 게 제철 행복이다. 엄마 덕분에 자연의 맛에 길든 나 또한 나름의 제철 음식을 즐긴다.
이른 봄이면 들녘에서 흙 내음 맡으며 캔 야생 달래전, 앞산에 진달래 벙그면 진달래 화전, 시냇가에 돌미나리 파릇해지면 돌미나리 전을 부친다. 햇쑥을 뜯어 땅콩 넣은 쑥설기를 만들고, 장마철엔 쫀득한 감자전, 한여름엔 오이채에 버무린 비빔국수로 입맛을 돋운다. 늦가을엔 달큰한 무전, 눈발 날리면 굴파전, 뜨끈한 국물 생각나면 어묵탕… 이런 식이다.
돈만 주면, 계절에 상관없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가장 알맞은 계절인 제철에 먹는 맛은 또 다르다. 호박죽은 늙은 호박을 시렁에 얹어 놓고 먹어야 하고, 팥죽도 한옥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는 동지에 먹어야 제맛이 아니던가.
가을 단풍도 제대로 못 누렸는데 입동이 다가온다. 까치밥 닮은 선물이 제철이라는 입동 무렵엔 무얼 할까, 은행잎이 노랑나비처럼 떼를 지어 날면 누굴 만날까. 첫눈 오는 날은 어디에 머물까, 나만의 연례행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환해진다.
무엇보다 제철 행복은 나눌수록 기쁨이 커진다고 한다. 엄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간파하고 도토리묵을 여기저기 퍼 나르고 계실 터이다. 언제까지 엄마표 진짜배기를 먹을 수 있을는지.
◆ 서미숙 주요 약력
△경북 안동 출생 △계간 '문장'(2015) 등단 △수필집 '남의 눈에 꽃이 되게' 기행수필집 '종점 기행'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프리랜서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