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가 찰칵 댈 때마다
책인데, 글이 하나도 없다.
사진만 있는데, 글이 한 가득이다.
세상의 모든 구석에서 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결정적 순간’의 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케르테츠의 셔터가 찰칵 댈 때마다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후대 사진가들은 '포토저널리즘의 새로운 길을 열었고, 내밀한 순수성을 잃지 않는 작가’로 평가한다. 나는, 무슨 마음이기에 수많은 대상 중에서 '읽는, 사람' 시선을 두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문자중독증 군단에 속해 있는 나는 이렇게 사진만 있는 책을 보면 일단 머릿속이 약간 창백해진다. '인디아 페일 에일'을 한 잔 마셔야 할까. 페일(Pale)이라는 말을 동시에 쓰는 '창백함과 맥주'의 알 수 없는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앙드레 케르테츠(André Kertész, 1894~1985)를 펼쳐본다.
헝가리 태생으로 미국시민으로 귀화한 사진작가. 그의 거울을 이용하여 왜곡된 인체 누드를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지만, 나는 파리의 거리 풍경이나 서민의 생활을 찍은 사진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서…. 이 책 <On Reading>을 영어 번역자에게 물어보니 ‘독서에 대하여’라는 게 정확한 번역이라고 알려주는데도, 나는 왠지 ‘읽는다는 것에 대해’라는 말이 이 책과는 더 어울리는 기분이 든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디에서든지, 읽는다.
'읽는다'는 행위는 인간을 좀 더 나은 세계로 이끈다. 그 세계가 고차원적일 필요야 없지만, 다른 세계를 맛본다는 건 특권이다. 읽는 동안 생각하고, 느끼고, 두 눈을 감고 우주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이 책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이미지는 세 소년이 무릎을 맞대고 책을 들여다보느라 등을 구부린 사진인데, 작가가 21살에 찍었다고 한다. '구부린 등'에 책에서 나온 영혼의 날개가 얹혀 있는 듯하다. 1915년부터 1970년 사이에 찍은 사진들이 담긴 이 작은 책은 그의 시그니처 작품집인데, 특히 사진과 문학의 팬들이 이 아름다운 작업의 이미지들을 좋아할 것 같다. 글이 없는 디카 에세이라고 할까. 침묵이 글을 대신한다. 잘 들여다보면 침묵의 희미한 틈 사이로 ‘생각의 공간’을 찾을 수 있다.
도쿄, 파리, 헝가리, 뉴욕, 지붕 위, 공원 벤치, 시장의 통로, 복잡한 거리, 문 출입구, 교도소 면접실, 거리의 돌기둥 아래, 집 창가와 소파에서, 다리 위, 연극 뒤 무대, 잔디 위,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침대 위에서 읽는 모습들을 촬영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책을 읽는 존재가 내뿜는 고요한 열기에 취한다.
시적인 이미지들이 말을 건다. 글보다 더 글 같은 이미지들로.
투명한 호박 빛깔의 '시에라네바다 페일 에일'을 마시며, 베보 발데스의 'Veinte Años(20년)'의 음악을 들으며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8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수필극 '튕' △제43회 조연현문학상(한국문협 주관),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