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여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단지 단순하고 쓸데없는 이유 때문이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이론을 내세울 것도 특이한 제목의 낯선 기쁨도 아니다. 그저 이 책의 작가가 여성 최초의 T.S 엘리엇 수상자이고,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시와 글들을 서두에 인용했으며, 무엇보다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라는 점이 나를 이끌었다.

탱고와 에세이. 그 둘의 다리가 '허구'이다. 에세이가 자기를 얘기하는 건데 허구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쓴 걸까. 소설적인 수필? 거기에 탱고를 얹었나? 그렇다면 글들이 격렬한 탱고의 이미지 위로 흘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탱고의 음音들이 흘러가지 못하고 '탱고'라는 문자에 가로막혀 주춤거리고 서성댄다.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 반도네온 연주의 애절한 음들만이 가슴을 지나간다.

"내게 정부가 있어" 라며 남편이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사진 한 장을 내밀던 밤에, 그녀는 "불의 옷을 입고 하늘에서 뒹구는 기분을 느꼈다.(P21)"라는 페이지를 펴는 순간 한 여자의 고통의 사랑이 훅 들어왔다.

이런 구절이 들어있는 앤 카슨의 <남편의 아름다움>은 한 여자가 자기 남편의 아름다움에 빠진 이야기이다. 치명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어두운 유혹도 빠짐도 아닌 '사랑'이다. 화자인 아내가 어린 시절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한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배신을 겪고, 이별에 이르는 게 겉의 스토리이다. 겉만 봐서는 막장드라마의 구성이다.

남편의 정부는 씻지 않는 프랑스 여자였지만 남편을 충족시켜 주었고, 아내는 남편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나를 다치게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와 그 모든 것의 이유인 남편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존 키츠의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그대가 지상에서 아는 모든 것이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 쓴 시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를 불러낸다.

예술지상주의이자 죽을 때까지 오로지 미의 탐구와 창조에 헌신했다는 그에게 헌정하고픈 마음이 앤 카슨에게 있었던 걸까. "자기 이름을 물 위에 적은 사람이 여기 누워있다"고 묘비에 적혀있는 존 키츠. 결핵에 걸려 26살에 요절한 시인의 글이 29장의 서두에 실려 있다. 아프다.

상처는 스스로 빛을 낸다. 상처에서 나오는 빛으로 붕대를 감을 수 있다는 작가.   하나의 정신이 상상을 통해 다른 정신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존 키츠. 당신에게 별로 쓸모가 없지 당신 없는 나는.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당신은 나를 울린다는 책 속의 아내. 세 사람의 말이 가슴으로 후루룩 쏟아진다.

눈을 감는다. 눈꺼풀에 상상을 얹는다. 찬란한 태양 아래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Felicita(행복)'의 노래를 들으며 이태리 밀라노 거리를 걸어가면, 발걸음 밑으로 '삶'이 팡팡 튕기며 사방으로 행복이나 기쁨이 분수처럼 퍼져나가리. 이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여! 행복하소서! 고통의 눈물이 숨어있더라도. 지금만은, 사랑을.

달콤한 젤라또를 먹으며, 알 바노(Al Bano)의 'Felicita(행복)'을 들으며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8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수필극 '튕' △제43회 조연현문학상(한국문협 주관),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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