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임선혜가 만프레트 호네크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헨리크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중 2악장을 부르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소프라노 임선혜가 만프레트 호네크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춰 헨리크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중 2악장을 부르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소프라노 임선혜는 ‘아시아의 종달새’라는 예쁜 별명을 가지고 있다. 1999년 고음악의 대가인 필립 헤레베헤에게 발탁돼 유럽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르네 야콥스, 주빈 메타, 리카르도 샤이, 이반 피셔 등 거장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한 무대에 섰다. 맑으면서도 사색적인 음색으로 바흐와 헨델 등 고음악 레퍼토리에 주력하고 있다. 한국인 성악가로는 조수미 이후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임선혜는 지난 9월 14일 만프레트 호네크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공연을 펼쳤다.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의 교향곡 3번 ‘슬픔의 노래’ 중 2악장을 노래했다. ‘슬픔의 노래’는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곡이다. 1976년에 완성됐으니 현대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현대음악 특유의 난해함과 복잡함과는 거리가 멀다. 2악장 전체가 모두 렌토(Lento), 즉 아주 느리게의 템포 지시로 되어 있다. 같은 모티브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진행되는 미니멀리즘적 특징이 크게 어필했다.

초연(1977년) 당시 흥행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1991년 초 데이비드 진먼이 지휘하고 소프라노 돈 업쇼가 노래한 런던 신포에타의 음반이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없이 입소문을 타면서 팔리기 시작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 클래식 부문(1991~1993년)에서 38주 연속 1위를 포함해 무려 138주간 등재됐다. 단기간에 세계적으로 100만장이 판매됐다.

임선혜의 목소리를 타고 “엄마, 안돼요, 울지 마세요. 천상의 순결한 여왕이시여, 항상 저를 지켜주소서. 은총이 충만하신 마리아여”가 롯데콘서트홀에 울려 퍼졌다. 낯선 폴란드어로 불렀지만, 무대 스크린에 한국어 가사를 띄워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2악장의 가사는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폴란드 자코파네라는 마을의 게슈타포 지하 감옥에서 발견된 낙서를 노랫말로 삼았다. 헬레나라는 이름의 열여덟 살 유대인 소녀가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 남긴 메모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세상에 대한 원망이 가득할 법도 한데, 오히려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어머니를 위로하는 기도문 형식으로 썼다.

더블베이스가 주도하는 낮고 무거운 사운드가 음악 전체를 리드했다. 그 소리 위로 ‘임 소프(임선혜 소프라노)’가 청아함과 엄숙함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짧은 가사를 되풀이했다. “엄마, 안돼요, 울지 마세요. 엄마, 안돼요, 울지 마세요.” 신비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는 슬픔과 고통을 넘어선 무아의 경지로 이끌었다. 한바탕 울면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경험을, 노래 한 곡으로 똑같이 체험했다. 다행스럽게도 18세 유대인 소녀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소프라노 임선혜와 지휘자 만프레트 호네크가 손을 맞잡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소프라노 임선혜와 지휘자 만프레트 호네크가 손을 맞잡고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소프라노와 지휘자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슬픔의 노래’를 끝마치면서 곧바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내일’을 들려줬다. 중간에 박수 소리가 끼면 감동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일이면 태양이 다시 빛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걸어갈 그 길 위에서 태양은 우리 행복한 이들을 다시 하나 되게 하리라. 태양을 호흡하는 이 대지 한가운데서.” 잠깐의 틈도 없이, 따사로운 희망이 느껴지는 상반된 곡을 다음에 배치했다. 임선혜와 호네크의 아이디어가 빛났다.

이 곡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행복했던 순간이 반영돼 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던 소프라노 파울리네 데아나와의 사랑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면서, 그 기쁨에 겨워 작곡했다. 결혼 선물로 ‘4개의 가곡집(Op.27)’을 줬는데, 그 마지막 곡이 ‘내일’이다.

편안한 분위기의 아르페지오 반주 위로 독주 바이올린이 이끄는 긴 전주는 성악이 시작되기 전 한편의 기악곡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임선혜의 목소리와 악기는 각각 독자적인 선율을 자아내며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 했다. 우아한 하프 소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환희를 닮았다.

임선혜가 피날레로 고른 곡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모테트 ‘환호하라, 기뻐하라’.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함께 세 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투어했다. 이때 마지막 여행에서 자신의 3막짜리 오페라 ‘루치오 실라’를 초연했다. 주역을 맡은 카스트라토 베난치오 라우치니의 노래에 홀딱 반했다. “마치 천사가 노래하는 줄 알았다”며 극찬했다. 3주후 모차르트는 라우치니의 기교를 뽐낼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장치를 넣은 작품을 작곡해 선물했다. 그게 바로 ‘환호하라, 기뻐하라’다.

임선혜는 2곡의 아리아와 그 사이의 레치타티보, 그리고 마지막 알렐루야로 구성된 포맷을 활력 넘치게 소화했다. 부드러운 파트에서는 비단처럼 섬세한 소리를 빚어냈다. 무엇보다 알렐루야 피날레는 고도의 성악적 기교를 요구하는 데 엄청난 스킬을 보여줬다. 가사는 종교적이지만 음악적으로는 대단히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야누스 같은 노래를 잘 담아냈다.

안타깝게도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다. 먹고 살기 바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미션 임파서블’이 됐다. 그래서 임선혜와 만프레트 호네크, 그리고 서울시향이 호흡을 맞춰 모든 이들의 눈물을 닦아준 것은 값진 일이다. ‘슬픔의 노래’에 뒤이어 ‘내일’과 ‘환호하라, 기뻐하라’를 노래해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멋진 슬픔 극복 솔루션 음악이다.

이번 공연은 하나금융그룹이 협찬했다. 하나금융이 서울시향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6년 ‘서울시향의 베토벤 심포니 사이클’ 때부터다. 17년째 꾸준히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맡고 있다. 올해만 하더라도 6월 ‘미하일 플레트뇨프와 선우예권’, 7월 ‘얍 판 츠베덴의 베토벤과 차이콥스키’ 등 굵직한 공연을 서포트했다. 10월에도 '최하영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공연에 힘을 보탠다. 클래식 공연의 질적인 발전은 물론, 일반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의 감동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건강한 기업문화 실천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임선혜와 만프레트 호네크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을 만났다. 진심 ESG 경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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