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데일리한국 민병무 기자] 특이한 이력이다. 세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다양한 악기를 두루 섭렵했다. 싹수가 보였다. 1995년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재즈아카데미 1기생으로 들어가 작곡·편곡을 배웠다. 작곡가 한상원, 원일 등과 교류하며 베이스와 건반 세션으로 활동했다.

1999년 17세에 이적(보컬), 정원영(키보드), 한상원(기타) 등 내로라하는 뮤지션으로 구성된 ‘긱스’의 베이시스트로 음악계에 데뷔했다. ‘천재소년’ 꼬리표가 붙었다. 2003년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며 1집 앨범 ‘눈물꽃’을 발매했지만 스스로 역량이 부족함을 절감했다.

방향을 틀었다. 영화·드라마·무용·뮤지컬·전시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윤상·김동률·박효신·보아·아이유 등 유명 가수에게 곡을 주며 프로듀서 활동에 주력했다. 박효신의 히트곡 ‘야생화’도 작곡했다.

깊고 넓은 음악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었다.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잠깐 다닌 뒤 고등학교를 가지 않았다. ‘내가 교육을 받았으면 더 잘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나는 ‘근본 없는 음악가’다. 그래서 더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즘은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경계가 이미 허물어진지 오래다”라고 강조했다.

지난 15일과 1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섰다. 16일 공연을 봤다. 그의 이름 석자를 세계에 알린 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영화 ‘기생충’ ‘옥자’ ‘브로커’의 음악을 맡으면서부터다. 영화·드라마 작업의 결과물, 레이블 ‘데카’에서 발매한 솔로 앨범 ‘리슨(Listen)’과 최근 내놓은 디지털 싱글 ‘어 프레이어(A Prayer)’의 수록곡들, 그리고 전통 음악과의 협업물 등 세 파트로 음악회를 짰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를 보고 반했습니다. 금세 광팬이 됐어요. ‘어느 가족’에서도 엄청난 놀라움을 보여줬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입니다. 언젠가 꼭 만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구구절절 메일을 보냈죠. ‘당신 영화의 음악을 내가 맡고 싶다’고. 그래서 결국 가장 성공한 팬이 됐습니다.” 어쿠스틱 기타를 메고 ‘브로커’에 나오는 ‘To Be a Bird(새처럼)’와 ‘Forgiven(용서)’을 들려줬다.

“영화 ‘남한산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작품 하나 같이 해보자’고 러브콜을 보냈어요. 무조건 한다고 했죠. 그 즉시 ‘남한산성’을 몇 번이나 다시 봤는지 모르겠어요. 공개되고 2~3주쯤 지나니 폭발적인 반응이 몰려왔어요. 어안이 벙벙했죠.” 456억원의 상금을 놓고 의문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Round 1’ ‘Way Back then’ ‘Pink Solders’ ‘I Remember My Name’ ‘Round 6’ ‘Unfolded’를 연주했다.

그리고 ‘Listen’에 수록된 ‘Incendies’에 이어 ‘Those Who Crossed the River(강을 건너간 사람들)’을 잇따라 들려줬다. ‘Those Who Crossed the River’는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와 듀엣으로 선사했다.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시노그라퍼 여신동의 무대·조명 연출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재일이 지난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고 있다. 시노그라퍼 여신동의 무대·조명 연출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참여하게 된 ‘썰’을 풀어 놓았다. 흥미진진했다. 평소에도 봉 감독의 엄청난 팬이었는데 음악을 맡아 달라고 초이스를 받아 무척 기뻤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작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 일인가.

“감독님의 요구 사항은 ‘엉터리 바로크 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며칠을 고민하다 하나 만들어 가면 캔슬, 또 며칠 고민 끝에 하나 만들어 가면 캔슬이었어요.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슬쩍 들이밀면 어김없이 퇴짜를 맞았어요. 그러다 술을 잔뜩 마시고 일어나 숙취 속에서 만든 곡을 줬는데 OK를 하셨죠.” 아카데미 작품상을 어시스트한 ‘Zappaguri(짜파구리)’와 ‘The Belt of Faith(믿음의 벨트)’ 등을 선사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하부무대가 위로 솟아오르며 국악팀이 등장했다. 소리 김율희, 대금 아이람, 아쟁 배호영, 그리고 출중한 실력의 사물연주팀 ‘느닷’. 이들과 함께 앨범 ‘A Prayer’에 수록된 ‘On the Road(길닦음)’와 ‘A Prayer(비나리)’를 연주했다. 지난 10월 런던 바비칸 센터 공연에서 관객의 환호성과 기립박수를 받았던 곡들이다.

정재일이 인터미션 없이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모든 곡의 연주를 마쳤다. 브라보 환호가 쩌렁쩌렁 울렸다. 무대로 다시 나온 정재일은 “한때 싱어송라이터를 꿈꾼 적이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직접 노래까지 해 음반을 발표했다”며 앙코르 첫 곡으로 ‘주섬주섬’을 불렀다.

“10대 때 이적 선배님이 노래 한 곡을 들려주었어요. 달랑 기타 하나에 목소리 하나 만으로 연주하는 곡이었죠. 단순하고 소박했는데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능가했습니다. 그 노래를 조금 편곡해 연주하겠습니다.”

통기타를 쳤다. 잔잔한 음악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 하얀 눈 내려오면 /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있네 /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가수이자 대학로 소극장 학전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민기가 부르는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에 대해 그는 “어린 시절 여러 음악을 찾아 방황하던 시기에 저를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이끈 예술가다”라고 소개했다.

김민기가 실제 무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미리 음반에서 따낸 육성에 맞춰 새로 편곡한 선율을 덧입혔다. 콧등 찡했다. 뭉클했다. 최근 학전의 폐관 결정과 함께 김민기의 위암 투병 소식이 전해진 터라 감동이 더욱 컸다.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도 살짝 들렸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김민기가 전날(15일) 공연장을 찾아 직접 관람했다고 귀띔했다.

최근 금융그룹들이 상생금융에 부응하기 위한 조직 만들기에 한창이다. KB금융은 ‘ESG본부’를 그룹 상생금융을 총괄하는 ‘ESG상생본부’로 확대 개편했다. 신한은행은상생금융기획실과 사회공헌부를 통합해 ‘상생금융부’로 덩치를 키웠다. 하나금융도 취약계층, 소상공인(자영업자), 청년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그룹ESG부문’ 산하에 ‘상생금융지원 전담팀’을 신설했다. 참 반가운 소식이다.

2023년이 떠나고 2024년 새해가 밝았다. 그래서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정재일과 김민기를 끈끈하게 연결해준 ‘아름다운 사람’처럼, 고객과 은행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은행’이 탄생하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데일리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