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금철 수필가 '소반다듬이'...한국수필 11월호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수필 창작은 제재의 본성을 추구하여 삶의 지혜를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독자도 함께 울리려면 치밀한 사유 전략이 필요하다. 수필은 자연, 인간, 사회현상 외에 체험의 기억도 제재가 된다. 창작 과정에서 수필 작가는 제재의 속성과 삶의 의미 관계에서 유사성, 동일성, 인접성을 찾아내어 그 유비적 관계를 찾아낸다. 상상을 통하여 삶의 보편성이나 우주적 원리로 확장하는 것이다.

신금철의 <소반다듬이>는 '소반다듬이'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여 인간의 본성과 내면의 정서를 다듬어 삶의 진리를 보편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작가는 깊어가는 가을의 길목에서 소반다듬이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소반다듬이는 소반 위에 쌀이나 콩 같은 곡식을 한 겹으로 펴놓고 뉘, 티끌, 잔돌을 골라내는 일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모습을 그려낸다. 할머니는 뉘나 티끌을 찾아 버리면서 할머니의 삶에서 슬픔과 한을 찾아 함께 버렸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우리네 할머니들은 전쟁에서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슬픔, 가난을 견디어내야 하는 한을 가슴에 지니고 사는 것이 보편적 현실이다. 소반다듬이와 삶의 지혜를 유비적으로 연계하여 삶의 원리로 형상화하였다.

소반다듬이는 할머니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텃밭에서 거둔 두어 됫박의 검은콩을 소반다듬이하면서 그 의미를 반추한다. 소반다듬이에 의해 '선택 받은 것'과 '선택 받지 못한 것' '선과 악', '가치와 무가치'라는 양분된 의미를 화두로 삼는다. 사유의 단계에서 제재의 속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의미를 확산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단순한 일상도 수필가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연결시켜 인식한다.

소반다듬이에서 가치와 무가치로 양분되는 인간적 이미지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찾아 대비한다. 헛된말, 흉악한 말, 우화적인 말, 직설적인 말과 같은 개념들이 그것이다. 개인의 말은 문인의 말로, 다시 사회구조로 확장한다. 사회구조에서 부도덕, 무질서, 불신이 바로 뉘이고 티끌이다. 여기서 삶의 자세에서 소반다듬이해야 할 것을 제시한다. 사회의 질서. 우주적 원리라는 깨달음을 찾은 것이다. 독자는 본성과 정서의 수평적 감응을 경험하며 작가와 일체가 된다. 

이 작품은 어떤 구상도 계획도 없이 차분하게 들려주는 속삭임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탐구과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제재의 속성에서 나, 문인, 사회, 인간세계로 수필적 상상은 전략적 단계를 밟아 확장되었다. 

이처럼 인식의 과정이 전략적이지만, 형상화 과정에서도 문단과 문단 사이의 관계, 문단 내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와 위상이 매우 규칙적으로 전개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문장에서 어절 간의 격(格)도 주제와 정서를 전달하는데 각각 기여하고 있다. 인식의 과정 뿐 아니라 수필문장의 신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평가할만하다.  

◆ 이방주  주요 약력

△충북 청주 출생 △<한국수필>(1998) 수필 <창조문학>(2014) 평론 등단 △현재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사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수필집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외 6권 △수필선집 '덩굴꽃이 자유를 주네' △평론집 '해석과 상상', 수필창작이론서 '느림보의 수필 창작 강의'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대상 수상

♣소반다듬이-글/신금철

구월은 열매달이다. 아직은 여름의 기세에 눌린 가을이 주춤거리지만, 들녘엔 금빛 알곡들이 소리 없이 익어가고, 콩꼬투리에도 콩들이 알알이 속을 채우고 있다.
 
유례없던 폭서에 조락(凋落)하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안타까움, 무더위에 제 색깔을 내지 못하고 창백한 과일 낯빛에 애태우는 농투사니, 열상으로 타 죽은 채소들로 치솟은 물가 때문에 추석 명절엔 주부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삶의 경험과 지혜로, 풍요로운 가을을 기대하며, 일손이 바빠질 농부들의 수고에 감사의 마음을 되뇐다.

어린 시절, 가을이 되면 집 마당에 쌓아놓은 볏가리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고 '와랑, 와랑' 탈곡기 소리도 경쾌하게 들렸다. 어깨너머로 도리깨를 휘두르며 콩을 터는 어머니의 모습은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추수가 끝나면 어머니는 겨울 준비를 위해 김장을 하고 이불 빨래에 다듬이질까지 쉴 틈이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유난히 사이가 좋으셨다. 여든이 넘었던 할머니는 깡마르셨지만, 눈도 밝고, 부지런하셔서 어머니의 일손을 많이 거들어 주셨다. 할머니는 달챙이 숟가락으로 구슬처럼 작은 감자 껍질도 벗기시고, 둥그런 양은쟁반에 쌀을 얇게 편 후 뉘를 잘도 골라내셨다. 키로 콩을 까부르신 후 마루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티끌과 잔돌을 고르시던 할머니와, '또닥, 또닥 또다닥' 리드미컬한 어머니의 다듬이소리는 다정한 고부의 상징으로 내 그리운 추억 속 명화의 한 장면이다.  

소반 위에 쌀이나 콩 따위의 곡식을 한 겹으로 펴놓고 뉘나 모래 따위의 잡것을 고르는 일이나 그렇게 고른 곡식을 '소반다듬이'라고 한다. 일찍 청상과부가 되신 할머니는 소반다듬이를 하는 동안, 6,25 전쟁에 아들과 손자를 한꺼번에 잃은 슬픔과, 가난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던 힘든 시절의 한(恨)을 풀어내시지 않았는지... 어쩌면 끼니 걱정으로 애태우던 옛날을 생각하며 하얀 쌀밥을 가족들에게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만족감으로 오직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셨을지도...

지난해 텃밭에 검정콩을 심었다. 처음엔 싱싱하게 크더니 잎이 마르고, 달린 콩꼬투리도 부실하였다. 친환경을 고집하여 끝까지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가을에 수확하니 콩 모양이 찌글찌글하고 제대로 형태도 갖추지 못한 게 많았다. 더구나 콩대를 뽑아서 밭둑에 걸쳐놓았다가 비닐을 깔고 털었더니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서 거실 탁자에 올려놓고 할머니처럼 소반다듬이를 했다. 

소반다듬이는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두어 됫박 되는 콩 중에서 티끌, 왕모래, 잔돌을 고르는데 눈이 가물가물,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뒤틀려 거의 한 시간을 소비했다. 어릴 적, 소반다듬이를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평화스럽고 재미있어 보였다. 그저 소일거리가 없던 노인이 소꿉놀이하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반다듬이를 하면서 할머니의 노고가 더 크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수고로 '뉘가 많은 밥을 먹으면 맹장염에 걸릴 수 있다' 라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어른들의 말씀에 두려웠던 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흰쌀밥에 드문드문 섞인 윤기 나는 검은 콩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으니 할머니의 소반다듬이는 식구들의 건강을 책임지신 중요한 역할이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소반다듬이를 끝내고 보니 선택받은 것과 버려진 것들이 마치 선과 악의 구별처럼 양분되어 대조를 이루었다. 가치와 무가치를 규정하는 소반다듬이를 통해 과연 나는 어느 쪽의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머뭇거렸다. 나의 삶에서 뉘와 티끌, 완숙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찌그러진 콩 등 많은 것들을 골라내야 할 소반다듬이가 필요함을 되돌아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완벽한 삶은 없다. 곡식에서 불필요한 뉘와 잡티, 잔돌을 가려내듯 우리의 삶에도 소반다듬이가 필요하다. '사불급설(駟不及舌)' 아무리 빠른 수레도 한 번 지껄인 말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 헛된 말, 흉한 말, 남을 모함하거나 자신에게 화근이 될 말을 삼가라는 것이다. '말로 입힌 상처는 칼로 입힌 상처보다 깊다' 라는 모로코 속담도 있다. 말로 인해 인간관계가 깨지고 그 상처로 인해 원한 관계로 범죄의 씨앗이 될 수 있고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 

나는 말을 많이 하는 날엔 언제나 후회를 한다. 돌아보면 부화뇌동으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우회적인 말보다 직선적인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스스로 반성하고 조심할 것을 다짐한다. 말의 소반 다듬이에 힘써야겠다는...

내게 필요한 소반다듬이가 어찌 '말'뿐이겠는가? 내 삶에서 잘못된 것들과, 골라내야 할 것들을 찾아내어 끊임없이 소반다듬이를 해야 하리라.      

권오운 소설가는 <우리말 소반다듬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 말의 중요성을 서술 하였다. 문학작품에 있는 잘못된 문장, 단어를 지적하여 정확한 어법을 쓰지 않은 어휘, 독자에게 부담이 되는 문장이나 단어 바로잡기에 나섰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더욱 우리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말 소반다듬이에 정성을 기울이며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깊이 새겼다.  

우리는 말과 글 이외에도 사회 전반에 만연되는 부도덕과 무질서, 불신과 부조리 등 혼돈과 갈등의 사회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함께 행복한 사회가 되도록 소반다듬이에 힘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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