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의 생각을 듣는 시간
"엄마, 멸치가 고기야?"
엄마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몇 학년인데 아직도 그걸 몰라?"
어느 날 남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그 친구네 집 어머님이 밥 먹고 가라기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멸치를 한 옆으로 빼놓는 나를 보며, 고기라며 숟가락 위에 얹어 놓아주셨다. "얼른 먹어, 고기야" 순간 어찔했다. 멸치는 고기인가 생선인가. 나중에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라는 광고 때문에 초등학교 시험에서 X자를 써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당황스럽고 애매모호한 심정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때 목으로 넘어가던 멸치의 그 비릿함에 속이 울컥대고 토할 듯도 했다.
생각해보면 고기일 것 같기도 하다. 칼슘 덩어리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말이다. 국수 국물 내는 데야 최고이고, 잔멸치를 꽈리 고추를 넣고 볶는 기술은 숙련공이어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경지를 살려 낼 수 있다. 나는 매번 실패한다. 그리고 생각에 빠진다. 나도 한 요리 하는데 왜 이러지? 겨우 멸치일 뿐인데...
<멸치 생각>의 작가 김지훈이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다가 조소를 전공한 조각가였고, 그 뒤 다른 일을 하고 살았다는 이력에 크게 이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맨 끝에 '멸치를 다듬다'가 글과 그림을 그려 책으로 냈다는 데에 호기심이 단박 일었다.
멸치의 생각을 '들었다'는 걸까, 아니면 '생각했다'는 걸까. 둘 다 있었다. 내가 멸치 볶음을 생각하고 잔치국수를 해 먹을 때, 그는 이 책을 내는 멋진 작업을 한 것이다. 그 흔한 멸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존재감을 듬뿍 얹었다. 사실 매우 특별한 글은 없다. 오히려 조금 심심하고 평범하다. 그런데 시원한 멸치 국물처럼 맑다. 맑아서 글맛이 순수하게 느껴진다. 그런 순함이 영혼의 음악을 불러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홀로 고요히 앉아 읽는 책이다. 오로지 멸치만을 고스란히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고 작은 멸치의 마음에 닿으려 손을 내미는 작가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문득, 그가 고맙다. 멸치 똥까지 버리지 않고 온전히 아끼는 작가의 심안(心眼)이 흔들리는 이 혼돈의 공간을 잡아줄 것만 같아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에른스트 슈마허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작은 멸치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세상이 순해질 것 같다. "시를 통해 일어나고, 예를 통해 바로 서며, 음악을 통해 완성된다"는 논어 태백편의 이야기가 귀에 울린다. 순(順)하면 선(善)해질까.
모든 음악은 베토벤으로 시작해서 베토벤으로 끝난다는 음악계의 전설 같은 말을 생각하며 블루투스를 트는데, 사방에서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른다. 음악도 멸치도 위대해지는 순간, 멸치가 몸을 비틀면서 한판 신나게 흔들어댄다.
소주 한 잔을 놓고 멸치를 한번 쳐다보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라단조 작품번호 31-2 '템페스트'-1악장을 들으며 읽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8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수필극 '튕' △제43회 조연현문학상(한국문협 주관),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