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김지현 기자] 정부가 ‘국민 주거안정 실현방안’(이하 ‘8·16대책’)에서 향후 5년간 수도권 도심에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을 통해 52만호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해당 물량은 '인·허가 기준'이라는 점에서 '청사진'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통상 정비사업에 10년 이상 걸린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입주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1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재건축·재개발 정비사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사업 속도를 앞당기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신탁 방식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정비사업에 드는 시간이 대폭 단축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신탁제도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완화하고 인센티브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 2016년 도입...'높은 수수료·생소한 방식' 초창기 외면
정비사업은 크게 '조합 방식'과 '신탁 방식'으로 나뉜다. 조합방식은 토지 등 소유자가 조합을 설립한 뒤 조합 주도로 시공사 선정, 인허가, 분양 등의 절차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신탁 방식은 조합 대신 제3자인 신탁사가 수수료를 받고 정비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2016년 3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하 '도정법')’이 개정되면서 가능해졌다. 조합이 설립된 상태에서 조합 대신 신탁사가 사업을 맡는 ‘대행자 방식’과 조합 없이 전적으로 사업시행을 위임받아 진행하는 ‘시행자 방식’이 있다.
신탁 방식의 최대 장점은 사업 기간 단축이다. 일반 정비사업의 경우 ‘추진위원회 설립→조합설립 인가→건축심의→사업시행인가→시공사 선정→관리처분 인가→이주 및 철거→분양’까지 단계별로 1년 가량 소요된다. 단계별로 차질이 생기거나, 조합원간 이해관계 충돌로 분쟁이라도 생기면 10년이 넘어가게 경우는 예사다.
신탁 방식은 추진위나 조합을 설립하지 않아도 되고 전문가가 인·허가 등 행정절차를 속도감있게 진행시키기 때문에 사업 기간을 최소 1~2년 정도 앞당길 수 있다.
도입초기 실제 사례가 없어 의구심이 일었지만, 지난 2018년 처음으로 대전에서 성공사례가 나오면서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대전 용운주공아파트 재건축 ‘e편한세상 에코포레' 사업장의 경우 2016년 7월 한국토지신탁이 신탁 방식의 사업 대행자로 지정되면서 총 2267가구 규모의 대단지가 2년 만에 분양까지 완료됐다. 이곳은 2003년 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 구성 이후 10년 넘게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사업성이 높은 곳일수록 조합원들이 사업시행자 지위를 넘겨줄 가능성이 낮고, 수백억에 달하는 수수료와 제도 미비 등이 걸림돌이 되어 여전히 활성화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국토부 통계에 따르면 신탁방식 정비 사업은 전체 4% 수준이다.
◆ 수수료 2%대로 조정...표준계약서 도입 분쟁방지
최근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다시 신탁방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둔촌주공'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기간이 지체되면 사업성이 크게 악화될 뿐 아니라, 재건축초과이익 환수제에 따라 이익 산정시 신탁사 수수료를 개발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수수료에 대한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수수료가 조정된 점도 문턱을 낮췄다. 업계에 따르면 초창기 전체 사업비의 4% 수준까지 올라갔던 수수료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2% 내외로 낮아졌다. 국내 신탁사는 한국토지신탁, 한국자산신탁, 코리아신탁, 무궁화신탁 등 11곳에서 2019년 한국투자, 대신, 신영이 신탁업 인가를 받아 14곳으로 증가했다.
신탁사가 시행을 맡으면 주민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와 계약한 뒤 내용을 수정하거나 신탁사를 바꾸기 힘들다는 점 등은 국토부의 표준계약서 도입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할 전망이다. 표준계약서에는 주민 해제권한 보장, 신탁 종료시점 명확화, 주민 시공자 선정권 명시 등이 포함될 예정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주민들이 비전문가다 보니 검토 사항 등을 잘 몰라 계약이 불공정하거나 불분명하게 체결되는 경우가 있었다"며 "표준계약서에는 신탁사 지정요건과 신탁사 업무범위, 수수료 산정 등 계약 전반에 걸쳐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골고루 포함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제도 시행 5~6년간 현장에서 문제가 됐던 부분들이 반영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 정비·사업계획 통합처리 인센티브..."3년 이상 단축"
8.16 대책에 따르면 신탁사가 시행하는 사업장은 토지소유자 다수가 희망할 경우 정비계획과 사업계획의 통합처리가 허용될 전망이다.
국토부는 조합설립절차 생략과 더불어 정비·사업 계획까지 통합 처리되면 3년 이상 기간이 단축된다는 계산이다. 아울러 신탁사가 시행을 맡으면 각종 조합 관련 분쟁을 없엘 수 있으며, 자금 조달도 용이해 정비사업에 드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실제로 사업초기단계에서 조합이 시공사 등 협력업체에 자금대여를 받아 사업진행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되고 비리가 발생하기도 한다. 신탁사는 신탁 자금으로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속도가 빠르고 금융감독원 등의 관리 감독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투명하게 자금이 관리된다.
반면 업계에서는 신탁사가 시행을 맡는다고 해서 비리나 분쟁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행정절차 간소화를 통한 시간 단축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공급대책으로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정부는 이 부분 의구심이 해소될 수 있도록 신탁사와의 계약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 정비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정비·사업 계획 통합안을 실효성 있게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오는 9월 관련해 도정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연말까지 지자체·전문가 의견수렴 등을 통해 신탁사 외 시행기관 확대, 인센티브 다양화, 조합사업 컨설팅 지원 등 후속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