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박준영 기자
데일리한국 박준영 기자

[데일리한국 박준영 기자]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 회담을 보며 영화 '곡성'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우리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제3자 변제’ 해법을 제시하면서 마련된 자리였던 만큼, 그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은 ‘일본의 완승’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듯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호응’은 없었다. 기시다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표현하며 직접적인 사과를 피했다. 일본 가해 기업의 배상 참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역대 내각의 인식을 계승하겠다”는 기존 입장과 같은 뻔한 답으로 역사의 죄의식을 덮은 채 경제·안보 협력 등에서 원하는 바를 손에 넣었다.

반면 윤 대통령은 이번 방일의 최대 관심사였던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그 어떤 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일본의 부족한 호응 조치에는 입을 닫았고, 일본 가해 기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구상권 청구는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줄곧 일본을 ‘협력해야 할 파트너’로 규정하면서 경제·안보, 민간 교류 부문의 성과를 부각하는 데만 주력했다.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도 않은 ‘국익’을 위한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마주한 90분은 정상회담이었을까. 아니면, 일본 쪽의 주장만 받아들여야 했던 ‘불편한 자리’였을까. '절반 채워진 물컵'을 가지고 간 순방길에서 '나머지 절반을 기대한다'는 말이라도 꺼냈으면 어땠을까. '구상권은 없다'고 그렇게 성급하게 못박을 필요가 있었을까. 

왜 우리의 윤 대통령은 국민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일본 측의 제안만 받아들여야 했는지 궁금하다. 왜 ‘이미 충분히 사죄했기에 사과를 요구하는 게 문제’라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지 묻고 싶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36년 동안 한반도를 무력으로 강점, 우리에게 고통의 역사를 안겼던 ‘가해자’라는 점이다.

물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하는 위기 상황 속 일본과의 협력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한일관계에 있어 ‘역사적 특수성’을 조금이라도 고려해야 하지 않았었나 싶은 아쉬움이 크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청춘을 빼앗긴 채 여전히 그날의 아픈 기억 속에 사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누구에게 기대야 할까.

한국의 위상은 과거와 달라졌다. 전 세계 제조업 5위 국가로 성장했고, 바이오의약품 제조 역량을 비롯해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 사업 분야에서도 약진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일본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만큼, 그들에게도 우리의 존재가 크다는 이야기다. 역량을 발판 삼아 때로는 큰 소리도 내며 상대와 줄다리기를 해야 윤 대통령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미래’가 있을 수 있다.

대통령실이 최근 공개한 영상 속 윤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라는 문구가 있다. 윤 대통령이 다시 한번 이 글귀를 읽고,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진 ‘책임’의 무게를 느끼길 바란다. 그 책임을 알고 있다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엄연히 존재했던 폭력을 ‘없던 일’로 만들려는 행태에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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