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안희민 기자] “현재 운전 중인 원자력발전소에 추가로 18기가 더 있어야 국내 전력의 원전 발전 비중이 50%에 달할 수 있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요?"
최근 전력수급기본계획과 녹색성장탄소중립위원회 등에 참여한 한 에너지 전문가를 만났더니 풀어놓은 푸념이다. 과학자인 그는 정부의 에너지정책 수립에 참여하며 근거가 되는 자료를 만들어 왔는데, 최근 논의되고 있는 에너지믹스에서 발전 비중을 50%로 책정한 원전 목표치의 근거를 의아해했다. 아무리 주판을 두들겨 봐도 원전의 발전 비중 50% 달성은 무리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원전 비중 50%를 주장하는 이들은 한술 더 떠 55%까지 주장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민주당은 지난 20일 국회 산자위 전체회의에서 정부 예산안보다 원전 관련 예산을 1831억 원 삭감하고, 신재생에너지 예산은 4501억 원 증액하는 내년 예산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켜 예결위로 넘겼다. 이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예산 증액은 기재부 등 관련 부처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현 상황에선 최종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민주당이 이를 알고서도 단독 처리로 통과시켰다면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다.
또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는 경직성 전원인 원자력발전을 유연성 자원으로 규정해달라는 요구가 나왔다고 한다. 원자력발전은 연료에 불을 붙이면 몇년간 지속되기 때문에 시시각각 변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하기 쉽지 않다. 원자로에 붕소 등 감속재를 넣어 출력을 조정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원전의 안전성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 당국은 횟수를 제한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을 유연성 자원으로 변경해달라고 요구하는 이들은 소형모듈원전(SMR)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아직 개발 초기인 소형모듈원전이 상용화하면 전력 생산을 유연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2년마다 수립되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은 국가 전력정책의 근간이 되기 때문에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수립돼야 하는데, 사업기획 단계에 불과한 소형모듈원전을 벌써부터 내세우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으로 보인다.
올해 국감 기간 중 국회 산자위에선 자원 개발 이슈가 다시 한번 부각됐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해외 자원개발사업은 국민 세금을 탕진을 이유로 대폭 예산이 깍였는데 최근 공급망 이슈가 부각되자 다시 힘을 얻는 분위기다.
충동적이면서 아전인수 식의 이같은 방침은 일선 정책 실무자들에게 피로감만 안겨주고 있다. 자원개발에 뛰어 들었다가 정치권의 질타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데, 다시 신규 자원개발사업에 나설 의지도 없고 그럴 예산도 없다. 대신 민간의 역량 개발 등 정치바람을 덜 타는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다.
'무(無)탄소연합'을 결성한 산업부가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같이 가야한다며 무탄소에너지를 띄우고 있지만, 여기엔 정작 태양광이 빠져 있다. 현 정부의 관심이 원전, 수소, 해상풍력이고, 태양광은 전임 정권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해석이 나온다.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 없다. 에너지원의 유용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과학적인 근거는 뒷전이고, 정치적인 판단과 정권의 요구만 남아 있다.
한국의 일조량이 하루 6.6시간으로 독일보다 높지만, 아직 우리나라 태양광발전 효율이 유럽에 비해 낮은 것으로 알고 있는 에너지업계 종사자들도 많다. 심지어 현 정부의 에너지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하는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도 잘못 알고 있다. 한국의 일조량이 태양광발전에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은 탈원전 논리에 맞서 '탈탈원전'을 내세운 세력들이 만든 허위 논리다.
겉보기와 실제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세상이다. 인문학자들은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한다. 특정 업계의 욕망과 권모술수가 정확한 데이터를 압도하는 '에너지정치'가 횡횡하는 정국이다. 기후재앙에 시달릴 후세들은 현재의 에너지정치를 어떻게 판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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