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11월4일자 31면 게재
비가 오려는지 창밖이 흐리다. 회색 하늘에 잿빛 먹구름이 어둡게 떠돈다. 거뭇거뭇한 구름들이 서서히 움직이며 한 방울씩 비를 뿌린다. 흐린 하늘처럼 마음도 침잠(沈潛)한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날엔 밖으로 나서기가 꺼려진다. 어두워진 세상이 싫기도 하고 시야도 흐려져 운전이 어려우며, 그냥 걷더라도 비를 맞으며 우산을 들고 다니기가 힘들어서다.
흐린 하늘을 회색빛이라 표현한다. 회색은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애매모호한 색이다. 채도가 낮은 이 색깔은 재색·잿빛·쥐색·쥣빛이라고도 불리며 영어로는 그레이(Gray)다. 창백한·음침한·따분한·노년의·원숙한·머리가 희끗희끗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로맨스 그레이(Romance Gray)란 말도 있다. 남자 노인의 중후하고 농익은 아름다움을 표현한 단어다.
회색은 흰색과 검정색을 합하면 만들어지는 무채색 중의 하나로 우울함과 좌절을 의미한다. 무엇이든 불에 타서 남은 재는 회색이 된다. 때론 허무나 보일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상황을 묘사하거나,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중간적 상황을 표현하기도 한다. 반면에 융합을 뜻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극과 극의 색깔이 혼합되어 있는 것처럼 융화되기 어려운 것들을 어우르게 하는 중립이나 지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사상적으로 선명하지 않는 사람들을 회색주의자라 부른다.
회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깔 중의 하나다. 옷장 문을 열고 마땅히 걸칠 만한 것을 찾지 못할 때 선택하는 옷이 회색이다. 어떤 자리에서든 지나치게 눈에 띄지 않아 무난하며 다른 색과도 가장 배색이 잘 되는 색이다. 특히 분홍색과는 조화롭고 우아하게 어울려 가끔 그렇게 배합을 하여 옷을 입으면 도시적인 세련미가 난다. 선호하는 색이기도 하고 두드러지지도 않는 빛깔이라서 내 옷장에는 흰색과 검정색, 회색 옷이 많다.
대학 시절, 학교 축제를 맞아 학생회관에서 클래식 콘서트를 관람한 적이 있다. 지명도가 있는 성악가들이 나와 공연을 했는데 그중에 나의 눈길을 끄는 여자 소프라노가 있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이 당당하고도 거만해 보였다. 그녀는 그랜드 피아노에 비스듬히 기대어 한쪽 팔을 얹고 높은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 입은 옷이 진회색 드레스였고 분홍색 머풀러를 길게 늘어뜨린 인상적인 모습은 아직도 나의 뇌리 속에 남아 있다.
회색을 주제로 한 영화와 문학작품들이 있다. '회색도시'란 제목의 기록 영화는 2007년 포항건설 노조원이 투쟁 중에 사망한 사건을 소재로 구자환 감독이 만들었다. 영화는 안개에 쌓인 것처럼 밝힐 수 없는 현실을 회색에 비유했다. 소설가 최인훈의 등단작인 'GRAY 구락부 전말기'와 또 다른 장편소설 '회색인'이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까지 억압된 사회 분위기에서 젊은이들의 고뇌와 방향을 묘사했다. 두 소설은 세상이 강요하는 양극단의 이념을 거부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회색의 의미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상징했다.
회색으로 대표될 수 있는 옷은 스님들이 입는 승복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세속을 등진 심정이 얼마나 절절했겠는가. 그리하여 선택한 삶은 계율과 고독, 자신과의 싸움이다. 세상과의 단절 후 입은 잿빛 승복은 세속의 끝없는 갈구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수행과 득도를 위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걸친 회색빛 승복은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색이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고요히 숨겨 놓고 있는 색이다. 불교에서 회색을 선택한 이유는 이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한다. 하지만 수행을 하려면 우선 그런 욕망들을 내려놓아야 하기에 잿빛 승복 속에 자신을 거두어 낮춘다. 승복은 겸손하면서도 무소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들이 입는 옷의 색깔은 청빈한 삶, 흑과 백의 초월, 원융(圓融)의 색을 상징하는 것이며 구름의 빛깔을 닮았다 하여 운수납자(雲水衲子)라 한다.
빗방울들이 창을 때린다. 한바탕 비를 쏟은 하늘은 진회색을 거두고 연한 회색으로 점차 변하고 있다. 우울했던 마음도 조금씩 맑아진다. 회색은 어둡지만 희망의 가능성을 내포한 색깔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햇살이 찾아오듯 회색은 밝음을 추구하는 빛깔이다. 회색빛 암울함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밝은 빛이 가득해지길 기원해 본다.
◆박인경 주요 약력
△경기도 평택 출생 △'창작수필'로 등단(2000) △한국문인협회 회원, 안성문협 수필분과장, 국민행복여울문학상 수필 금상(2023) △수필집 '은발을 날리는 오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