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그렇다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경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스페인어를 배울 때 'Agua'란 말을 좋아했다. '물(水)'이란 뜻으로, 나에게는 헬렌  켈러를 의미한다. 설리번 선생이 헬렌에게 처음 가르친 말이 바로 'WATER'였다. 영화 속에서 선생님은 우물물을 손에 부어주며, 손바닥에 수화 알파벳으로 'W,A,T,E,R'라고 쓰며 사물의 이름을 가르친다.

새로운 세상과의 첫 만남! 그 장면의 감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강의를 할 때 설리번 선생처럼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선생이 되길 기도한다. 그녀는 내게 선생으로서의 첫 표상이자 영원한 우상이다.

포르투갈 어로는 'Água'로 맨 앞에 악센트가 있어서 앞부분을 세게 읽어야 한다. 스페인어로는 두 번째 모음 'u'에 강세가 있는데, 후자가 발음이 훨씬 부드럽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뭔가 두 언어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것 같다. 허나 그 본질이야 어디로 가나. 그저 물(水)이다. 형태가 없이 형태를 만드는 마술의 물질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러시아 내전을 피해 브라질로 이주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책 'Água Viva'는 '살아있는 물'로 번역되지만, 일반적으로는 '해파리'를 뜻한다. 작가는 두 개의 공통점이 뼈대가 없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거기에다 책의 내용도 서사적 뼈대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다.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것, 모든 구조와 경계를 넘어선 그 무엇을 기록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그녀가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다. 형상 혹은 물체에 대해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 가능하다고 그녀는 믿는데, 나는 영 믿어지지 않고 그저 혼란에 빠져 허둥거린다.

설마, 하고 기대하지 말라. 끝까지 하나도 없다. 우리가 기대하고 좋아하는 '서술'의 틀 같은 건 아마도 개 집 뼈다귀 옆에나 있는 모양이다. 몽창 사라져 버렸다.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라도 집혀질까 싶어 손을 이리저리 휘저어도 여전히 빈손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겠지, 하고 마음을 달래본다.

그러면서까지 왜 읽느냐고? 기가 막히게 매력적이어서. 문장들이 엮어내는 아포리즘이 놀라워서. 어떤 문학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한 힘이 느껴져서. 문장을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냥 느끼면 곁에 다가서는 감각을 만져볼 수 있어서.

"나는 온 몸으로 당신에게 글을 쓴다. 말의 여린 신경에 가 박힐 화살을 쏜다"라든가 "나는 거칠게 살아있다. 죽음이 말한다. 자신은 떠난다고"거나 "지금은 하나의 순간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 온다"라는 글귀들이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게 좋다. 나에게 맞는 아포리즘의 한두 문장이 맥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거기서는 꿈은 생각이 되고, 거기서 선(線)은 존재가 된다는 미셀 쇠포르의 말이 정신을 건드린다.

브라질 보사노바의 여왕, 아스트루드 질베르토(Astrud Gilberto)의 개성적인 파스텔 톤 같은 음색으로 'Agua De Beber(마실 물)'을 들으며,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 책!

◆이경은 주요 약력

△서울 출생 △계간수필(1998) 등단 △수필집 '내 안의 길' '가만히 기린을 바라보았다' '주름' 외 8권. △그 중 수필 작법집 '이경은의 글쓰기 강의노트', 포토에세이 '그림자도 이야기를 한다', 독서 에세이 '카프카와 함께 빵을 먹는 오후' △디카 에세이집 '푸른 방의 추억들' △수필극 '튕' △한국문학백년상(한국문협 주관), 율목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숙명문학상 등 수상 △현재 방송작가, 클래식 음악 극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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