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다. 큰 뼈다귀 하나를 얻더니 물고 제 집으로 간다.
"저 놈이 허구한 날 속고만 살았나. 뭘 주면 그 자리에서 냉큼 먹는 법이 없어"
인부 한 사람이 녀석의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 던진다. 호동이는 목줄을 풀어놓고 키우는 이웃집 여섯 살 먹은 진돗개다. 그 집은 식구들이 모두 나가고 비어있을 때가 많다. 빈집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게 제 밥 값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짓는 공사장에서 하루해를 보낼 때가 많다. 개 역시 빈집보다 톱밥 먼지 날리고 작업 소음과 중장비 소리 뒤섞인 곳이더라도 사람 주위에 있기를 좋아한다. 걸리적거리고 위험하니 가라고 쫓아보지만 가는 척하다가 다시 와서 아예 자리 잡고 길게 눕는다.
인부들 새참으로 돼지족을 내놓으면 놈은 옆에서 기다리다가 고깃점이 붙은 돼지족 뼈다귀를 얻어 물고 유유히 자리를 뜬다. 제 주인이 주는 것 아니면 절대로 그 자리에서 먹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고 가서 제집 한구석에 감춰두거나 밭 귀퉁이를 파고 묻어두었다가 혼자 무료할 때 그것을 우두둑 우두둑 씹어먹는다고 한다. 놈은 신중한 성격인 걸까, 험한 세상이니까 남이 주는 것 덥석 받아 먹으면 큰일 난다고 주인이 훈련 시킨 걸까. 그 말을 명심하여 그런다면 독을 바른 돈인지 똥이 묻은 돈인지 모르고 덥석덥석 받아 먹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보다 낫다.
다람쥐는 가을에 알밤이나 도토리를 물어다가 여기저기 숨겨놓는다. 겨울을 위한 제 나름의 월동 준비다. 눈 쌓인 겨울산, 먹거리를 구할 수 없을 때 숨겨둔 식량을 꺼내 먹으며 겨울을 난다. 더러는 다람쥐가 잘 숨겨놓은 도토리 무더기에서 굴참나무 싹이 소복하게 나기도 한다. 다람쥐가 자손만대 먹을 식량을 염두에 두고 싹을 틔웠을 리 없고 숨겨두고 잊었거나 먹고 남은 것일 게다. 나도 다람쥐처럼 어딘가에 숨겨두고 까맣게 잊고 있는 현금 뭉치나 예금통장이 있지 않을까 젊은 날을 거슬러 올라가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없다. 소소하게 꾸어 주고 못 받은 돈이 있긴 해도 주어야 받는 것이니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오래전, 시가 친척 어른이 서울에 사는 나에게 유자청을 팔아달라고 부탁하셨다. 노인 내외분이 손수 유자나무를 키우고 따서 마주 앉아 곱게 썰어 담근 유자청은 향과 맛이 좋아 아주 잘 팔렸다. 택배가 없던 시절에 몇 차례 소화물로 받아 목돈을 만들어 드렸다. 한번은 유자청값으로 받은 팔만 원이 봉투째 없어졌다. 두었을 만한 곳을 샅샅이 찾아보아도 없다. 이제 막 돈맛을 알아가는 일곱 살 아들을 의심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내 돈을 채워 넣었다. 이문도 없이 좋은 일 하다가 손해 본 꼴이 되었다.
이태쯤 후에 일본 가는 이삿짐을 싸다가 서랍장 밑바닥에 흰 봉투가 보였다. 그 안에 팔만 원이 들어있었다. '그 돈이다' 나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서랍에 넣어 둔 것이 뒤로 빠진 것이다. 어린 아들을 의심했던 찜찜한 마음, 좋은 일 하다가 손해를 보았다고 여겼던 씁쓸한 기분이 단박에 날아갔다. 영문도 모르는 아들에게 두 장을 뚝 떼어 주며 마음으로 진 빚을 갚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이태 전에 잃어버렸다고 단념했던 그 돈 그대로 일뿐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크게 불려서 내 손에 쥐어 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게 웬떡인가 싶어서 연신 싱글벙글했다. 이웃집 호동이나 뒷산 다람쥐가 제가 묻어 둔 것을 찾아 먹으면서도 횡재한 듯한 착각의 행복감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내외는 오달지지 못하고 어리숙하다. 누군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주머니돈이라도 털어준다. 빌려줬다가 못 받은 돈, 투자했다가 떼인 돈이 소소하긴 해도 셀 수 없다. 남편은 복을 묻어두었거니 잊고 살라고 한다. 빌려 간 사람 형편이 여전히 나아지지 못한 탓이니 없는 셈 치면서도 '이게 웬 떡인가' 미련은 있다.
◆박찬정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일본에서 십여 년 살다가 귀국해 거제도에 정착 △계간수필로 등단(2015년) △아르코 문학창작지원 선정 △매일신문시니어 문학상 수상 △수필집 <목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