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무원 출신 최민호 작가의 심금을 울리는 동화 이야기
#.사과 왕국의 포도 대왕
1.
저녁 놀빛의 붉은색에 황금빛 살맛이 달콤한 사과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왕국 여기저기에 서 있었습니다. 사과 왕국에 가을이 오면 세상은 사과향으로 가득차, 호흡을 하는 기쁨으로도 행복은 충만되었습니다. 봄의 장미꽃 향기가 가을의 사과에서 다시 풍겨나왔습니다. 사과와 장미는 같은 과의 사촌이었습니다. 붉은 사과나무의 향기를 태우면 파란 장미꽃 불꽃으로 피어나는 것은 사과가 장미꽃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 한 알의 사과가 의사를 쫓는다.”
사과는 그 열매의 상큼함으로 건강을 선사하고, 든든한 나무 그늘로 안온한 휴식을 주었습니다. 사과를 맛보지 않은 자가 신의 축복에 감사한다는 것은, 꿀맛을 모르는 자가 벌에게 감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과 왕국의 자부심은 사과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왕국의 백성들에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했다는 원초적인 태생의 근원이 바로 자신들 사과였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과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그저 짐승으로 살았을 뿐이로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벌거벗고도 부끄러운지 모르고, 세상의 지혜도 진리도 알지 못하고, 저기 나무 위의 원숭이처럼 벌거벗고 풀과 과일을 따먹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영원처럼 만족에 겨워 살아갈 뿐이었더라... 우리가 비로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었노라. 에덴동산에 우리가 있음으로 인해서...”
왕국의 백성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금단의 열매 사과를 따먹은 것을 도전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사과가 없었다면, 인간은 신에게 죄를 짓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눈이 밝아지지 않아 암흑 속에서 무지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삶도, 죽음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저 수많은 벌레들처럼....
‘이성과 지혜로 말미암아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되었도다.’
사과는 바로 인간의 이성(理性)이라는 열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성으로 인해 사람은 생각하고,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으로 인해 만물을 지배하는 영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성으로 인해 신과 마주 볼 수 있었습니다. 사과왕국은 이성을 기초로 삼아 사색의 기둥을 세우고, 지혜의 지붕을 씌웠으며, 지식의 탑을 쌓았습니다. 왕국의 입구에는 누구나 지나쳐야 하는 네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고, 기둥마다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인(仁)·의(義)·예(禮)·지(智)
- 아기가 우물로 기어가고 있다면, 그 누가 달려가 안지 않겠는가? (인) - 악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 누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의) - 먹을 것이 있다면, 그 누가 부모님께 먼저 양보하지 않겠는가? (예) - 다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누가 연유를 따져보고 싶지 않겠는가? (지)
왕국의 백성들은 이 네 기둥을 바라보며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이성적인 삶을 살 것을 늘 가슴에 새겼습니다. 왕국의 백성들은 기품이 있었고, 교양이 넘치며, 예의를 잊지 않았습니다. 왕국은 조용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사과나무는 이성의 열매를 탐스럽게 맺으며 왕국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2.
어느 날부터인가 사과왕국에 작은 소란이 생겼습니다. 왕국의 평온한 마을에 낯선 이방인이 들어와 떠들썩해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거리낌 없이 왕국에 들어왔습니다.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마을의 여기저기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포도나무였습니다. 넘실거리는 넝쿨손으로 사과나무의 기둥을 휘감으며 뻗어 올라가는 포도나무가 있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몸을 비틀어 의지하는 포도나무가 왕국의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점잖지 못하게 구부러져 자라는 줄기에 껍질마저 허물처럼 벗어던지며 제멋대로 뻗으며 자라는 포도나무는 철이 되자 검붉은 작은 열매가 다닥다닥 송이를 이루며 열렸습니다. 포도열매는 사과만큼 달았습니다. 그리고 많이 열렸습니다. 향기 또한 그윽했고 이국적이었습니다. 포도의 맛을 본 왕국의 백성들은 사과와는 색다른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맛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포도는 사과가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이한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었습니다.
와인이었습니다. 와인의 맛과 향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신사의 모습으로 우아하게 사과의 맛과 영양을 찬탄하던 왕국의 백성들 중에 포도를 예찬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갔습니다. 포도와인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와인에 도취되면서 세상의 낮이 밤이 되고, 숙녀가 탕녀가 되고, 양이 늑대가 되듯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소란이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3.
포도나무의 볼썽사나운 발호를 보다 못한 사과왕국의 귀족과 대신들이 왕을 중심으로 회의를 열었습니다. 왕국의 귀족들은 수염처럼 잎사귀를 내려뜨리고, 사과향이 은은한 향수를 뿌리고, 푸른 가지가 있는 칼을 차거나, 두꺼운 양장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왕의 주변에는 네 명의 호위 장군이 미동도 하지 않고 근엄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네 명의 장군은 '인·의·예·지'라는 문양이 그려진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습니다.
왕은 회의에 참석한 귀족과 대신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모두들 심려스런 표정으로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이 입을 열었습니다.
“최근, 우리 사과왕국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음은 경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고 있소.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대책인지 고견들을 말해보시오. 먼저 포도나무란 무엇이요?”
양피가죽으로 장정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던 학자풍의 사과나무가 왕에게 고하였습니다.
“포도나무는 예전에는 없었던 나무입니다. 언제부터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이름도 생소하여, 애초에 자랐던 페르시아 지방의 이름인 부도(Budaw)가 발음대로 전해져 포도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 맛과 성질은 어떻소?”
“예. 포도의 맛은 새콤하기도 하지만 달콤합니다. 즙이 많아 물이 없는 곳에서는 아주 귀한 열매입니다. 신기한 것은 포도를 따서 두면 껍질에 붙어있는 흰 가루 같은 천연효모가 발효되어 저절로 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술이 되는 과일은 포도밖에는 없습니다. 이 술을 와인이라 하옵니다만, 그 맛과 향이 백성들이 심취할 정도로 깊고 은은하여 누구나 마시면 빠져버리고 말 정도입니다.”
귀족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와인에 빠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이요?”
“신은 포도를 선물했지만, 와인 만드는 법은 악마가 선물한 것이옵니다. 아담이 포도나무를 심을 때 악마가 뭐냐고 묻자, 맛있고 기분 좋아지는 물을 만드는 열매가 맺는 나무라 했습니다. 악마는 포도가 잘 자라는 데 도움을 줄테니 자신도 그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허락하자 악마는 양과 사자, 돼지, 원숭이의 피로 포도를 키웠습니다. 그래서 와인을 마시면 양처럼 순해지다가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돼지처럼 아무 데서나 뒹굴다가 원숭이처럼 날뛰게 되었습니다. 와인을 많이 마시면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도 모르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의 모든 포도 알에는 악마가 있다.’ 코란에 써 있습니다. ”
“경은 포도에 매우 해박하구려. 이름이 무엇이오?”
“탈무드라 하옵니다.”
왕은,
“그렇다면 포도나무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소. 우리 백성이 양이 됐다, 사자가 됐다, 늑대가 되고 원숭이가 된다면 우리의 ?인의예지? 왕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소. 어떻게 생각들 하시오. 경들은?”
한 사과나무가 별안간 목을 젖혀 스스로의 목젖을 내 보이며 흥분된 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먹은 사과는 결국 목에 걸려 이렇게 넘어가지 않고 흉으로 남아 있소. 사람들은 가볍게 이 목젖을 ‘아담의 사과(Adam's apple)’라고 말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나서 원죄의 죄를 짊어지고 산고의 아픔과 삶의 고통으로 얻은 것이 바로 이 흔적을 남긴 ‘이성(理性)’이라는 귀한 아들이었소. 그런데 말을 듣자하니 포도나무는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나무라는 것 아니오? 어떻게 얻은 이성인데 그렇게 가벼이 잃을 수 있겠소이까? 결코 용납할 수 없소이다.”
피를 토하듯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아담 사과나무였습니다. 아담의 격앙된 발언에 이어 뉴턴이라 불리는 사과나무가 발언권을 얻었습니다.
“사과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사람들은 세상은 중력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로부터 세상은 과학과 인과관계라는 진리를 발견하여 왕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와인이라고 하는 사악한 기운이 이성의 힘을 무디게 하고 감정을 키워 합리성을 잊게 한다면, 마땅히 포도나무를 잘라 없애 감성보다는 이성의 힘이, 공상보다는 논리적 계산이 세상의 주인이 되도록 함이 천만번 옳을 것입니다.”
왕은 뉴턴 사과나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과연, 뉴턴 경다운 말씀이시오.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도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라고 새긴 비명이 헛된 것이 아니었소이다. 그려.”
그러면서 다시 한 대신을 가리켰습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오. 윌리엄 공.”
윌리엄 텔 사과나무는 허리를 굽혀 왕께 예의를 표한 다음,
“참된 용기는 누구도 자유를 침범당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평등의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비겁한 도피는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와인에 취해 거짓 용기로 만용을 부리는 세상은 결코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불의의 포도나무는 반드시 척결해야 할 것입니다.”
윌리엄 사과나무의 등에 맨 활이 부르르 떠는 듯 했습니다. 귀족들은 모두 포도나무와 포도의 자식, 와인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이성은 공짜가 아닙니다. 이성은 이성으로써 키워지는 법입니다. 값싼 감정에 이성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이구동성으로 부르짖는 외침에 회의장은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의견은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사과나무 귀족들은 포도나무에 대한 일대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의견은 없소이까?”
왕이 결연한 표정으로 귀족들을 둘러보자, 한 사과나무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습니다.
“비록 이성이 우리 백성이 가진 만물의 특권이라 하여도 이성은 한 쪽으로 치우쳐져서는 이성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만장일치는 무효이듯이 우리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날카로운 이성은 날카로운 칼날같이 위험한 것입니다. 비록 포도나무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논리를 비약시킨다 하여도 그들이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말할 기회를 주고 조치하는 것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예기치 못했던 반론을 가하는 사과나무에게 모두 싸늘한 눈총을 보냈습니다. 왕이 나무를 향해 물었습니다.
“경은 누구시오?”
“저는 튜링사과입니다. 세상의 컴퓨터를 발명하고 독사과를 먹고 자살한 자의 이름과 같습니다. 그가 발명한 컴퓨터는 가장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이었지만, 온 사회가 그를 동성애자라는 질시의 눈으로 매도하자 그는 가장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항거를 하였습니다. ‘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나는 가장 여성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그가 베어 먹은 독사과가 지금은 이성(理性)이 가장 숭배하는 컴퓨터의 상징이 되었고, 그 이름이 매킨토시라는 사과 품종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어 먹힌 사과와 컴퓨터를 자각없이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튜링에 대한 우리의 뼈저린 반성이 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회의장에 침묵이 찾아오고 다시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잠시 묵묵히 있던 왕은,
“이성이 우리 왕국의 시작이요 결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소. 비록 포도나무가 분별없이 감성에 취해 왕국을 침범한다 하여도 보다 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겠소. 시간을 가집시다. 회의를 마칩시다.”
그러면서 왕은 살며시 네 명의 호위장군을 불러 무엇인가를 작은 소리로 지시하였습니다. 왕은 호위장군의 보호를 받으며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4.
포도나무의 성에서 파티가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의 왕은 화려한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일곱 색깔 옷을 입고 시중을 드는 무희들에 둘러싸여 호탕한 파티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파티장은 와인의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 유쾌하고 행복한 웃음소리와 미소로 가득했습니다.
“포도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고 자라온 귀족의 과일이다. 로마의 황제나 귀족이 아니면 포도를 송이째 들고 먹는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불경이었다. 포도는 사람에게 신이 선물한 이 세상의 가장 큰 즐거움이로다. 와인이 없는 사랑과 즐거움과 위로를 상상할 수 있을까? 쾌락이 없는 풍요는 어리석은 수전노의 외로움처럼 공허할 뿐이다. 마셔라 와인을. 즐겨라 생의 기쁨을. 감사하라 지옥의 고통을 잊게 해주시는 신의 자비를...”
왕이 제안하였습니다.
“귀빈 여러분...와인에 대해 한마디씩 찬사를 해보시오. 가장 멋진 예찬에 가장 좋은 와인을 선물하겠소.”
왕의 기분 좋은 호기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환호를 지르며 와인 잔을 들고 나와 한마디씩 읊었습니다.
“와인은 병에 담긴 시(詩).” “신은 사람이 울 수 있도록 눈물을 만들었고, 웃을 수 있도록 와인을 만들었다.” “겨울에는 봄을 기다리며 와인을 마시고, 봄이 오면 봄이 왔음을 기뻐하며 와인을 마시게 된다.” “와인은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변함없는 증거이다.”
와인을 상찬하는 귀빈들의 와인예찬은 우아한 예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상의 와인은 헤르만 헤세 포도나무에게 돌아갔습니다.
“내 포도주잔 속으로 날아온 나비 한 마리, 술에 취해 달콤한 파멸에 몸을 맡기곤 젖은 몸으로 힘겹게 헤엄치다가 기꺼이 죽음을 향하니, 끝내는 내 손으로 건져냈네. 내 마음 그대 눈에 현혹되어 향내나는 술잔 속에서 환희의 침강을 하네. 그대 손짓 내 운명을 채우지 않는다면 그대 매혹의 포도주에 취해 기꺼이 죽음을 향하리. <술잔 속의 나비>
시를 읊으며,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며 밤은 깊어갔습니다. 왕의 손짓은 곧 음악이 되었고, 무희들의 춤이 되었으며 파티장의 고조되는 열정이 되었습니다. 파티장은 즐거운 열광에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포도나무들은 자신들의 신비함을 너울너울 가지넝쿨로 춤춰 보이며, 보라색의 달콤한 열매와 환상의 물을 권하는 미인들에 둘러싸여 마음껏 취했습니다. 어느덧 파티가 무르익어 끝날 무렵이 되자, 왕은 와인 잔을 높이 들고 외쳤습니다.
“신을 경배하시오. 우리에게 쾌락과 행복을 주신 신의 은혜에 경배하시오. 신은 세상에 포도를 주시어 우리를 축복하셨노라...”
파티장에 모인 포도나무들은 모두 잔을 높이 들고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신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 신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
포도나무들의 매일 계속되는 파티는 새벽이 되어야 끝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포도열매가 저절로 감미로운 술이 된 와인을 맛보며 ‘신의 물방울’이라 찬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물이 없을 때는 포도주로 목을 적셨고, 포도주를 마시며 샘솟는 생명의 힘을 느낄 때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하며 구원의 보혈이라고도 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말라버리거나, 포도가 열리지 않거나, 포도밭이 가시나무로 덮여 황폐하게 되었을 때는 커다란 슬픔을 받는 재앙으로 여겼습니다. 포도나무들의 자부심은 신의 특별한 은총이 세상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발효되어 그 넝쿨손을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파티장의 한 구석에 다른 나무의 눈길을 끌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플라톤이라 하는 사과나무였습니다. 플라톤 사과나무는 하늘 높이 들려오는 포도나무들의 희락의 함성을 들으며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 포도주만큼 위대한 가치를 지닌 것이 없도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 이파리로 자신들의 정체를 가리고 앉아있는 사과나무가 또 있었습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怜邂す?왕이 보낸 밀사였습니다. 밀사들의 눈은 무지갯빛 7가지 색깔로 온몸을 휘감은 아름다운 무희들의 춤에 꽂혀 있었습니다.
5.
사과나무 왕국이 눈에 띄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의 백성들이 여기저기 포도나무를 심는 것이었습니다. 포도나무가 많아지자 이방인들의 밤 축제는 더욱 더 성대해졌습니다. 사과나무 왕은 다시 회의를 열었습니다.
“경들은 무엇을 하고 계시오. 사과나무 왕국이 포도나무에게 잠식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백성들에게 사과의 진정한 맛과 영양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탓이 아니겠소? 지난번 포도나무 성에 들어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온 대신들이 말 좀 해보오.”
플라톤 사과나무가 입을 열었습니다.
“포도나무 성은 한마디로 광란이었습니다. 광란이란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도 모르고 하는 일 아니겠소... 오로지 술을 예찬하면서.... 그들은 옳은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에 빠져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이성의 분별력도 없었고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의 이데아를 모르는 감성의 무리들이었소. 쾌락이 행복이라 믿고, 신이 자신들에게만 쾌락을 누리는 은총을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소이다. 어리석게도 신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 이성인 줄을 모르고... 그렇지만 무서웠습니다. 저 강렬한 와인의 유혹을 누가 쉽게 떨칠 수 있겠소. 저 이성을 마비시키는 감미로운 미약을... 포도나무는 위대한 힘과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이 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과 왕국을 송두리째 뒤엎을 정도로...”
플라톤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마쳤습니다. 이때, 뉴턴이 플라톤을 보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옳은 것이요?”
플라톤은 투명하리만큼 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동물에는 뇌가 있지 않소? 본능의 뇌, 감정의 뇌, 이성의 뇌... 본능과 감정이 시키는 바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요. 이성이 시키는 바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양심이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면...”
좌중에 있는 대신들이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없는 뱀과 악어, 개, 사자는 오로지 본능과 감정에 따라 움직일 뿐이니... 그러니 감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 사람은 짐승이라 해도 좋겠소이다. 이성만이 사람과 짐승을 구분짓는 레드라인 아니겠소...”
플라톤이 말을 마치자, 왕을 호위하는 네 무장이 나섰습니다. '인의예지' 호위장군이었습니다.
“우리는 파티 장에서 춤추며 모든 손님들을 뇌쇄시키며 사로잡던 무지갯빛 무희들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각각 개성과 매력이 넘쳤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수줍어하다가 살며시 이름을 말해주더군요. 자신들은 마음의 7가지 무지개라 하면서...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와인 파티에서는 왕과 그녀들이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었습니다.”
“이름이?”
“'희·노·애·락·애·오·욕'이라 한다 했습니다.”
모두들 '인의예지' 장군의 입을 쳐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는 7가지 감정이라 했습니다. 기쁘고, 화나고, 사랑하고, 즐겁고, 슬프고, 부끄럽고, 욕심이 생기는 7가지 마음이 바로 그녀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가슴을 온통 사로잡고 흔들어대는.... 포도나무 성에는, 우리 사과나무 왕국에 없는 그런 아름답고 다양한 무희들이 넘쳐흘렀습니다. 그런 화려함과 다채로움에 눈이 부셨습니다. 포도나무 성에 손님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당연한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저마다 개성이 있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인의예지' 장군들은 그러면서 내심 무희들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눈을 못 뗐던 기억이 되살아나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습니다. 모두들 한숨을 푹 내쉬었습니다. 웅성대는 소리도 여기저기 들렸습니다. 사과나무 왕은 난감해졌습니다. 그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누군가 이 상황을 정리해 보시오. 누구 없겠소?”
헛기침을 한 두 번 하면서 사과나무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멈추고 나서,
“제가 이 난국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겠습니다. 행복이란, 불행이 닥쳐와도 결코 그 행복을 감소시킬 수 없어야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했다는 만족감이 있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성적이고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어떤 인생의 부침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이성에 근거를 둘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말초적인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그러니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성적으로 사는 것. 이것이 행복한 삶을 사는 우리 사과나무 백성들의 좌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이 무너져도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성입니다. 그것이 우리 백성의 삶이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성의 간밤의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초연하고 공평하고 엄격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삶 앞에서 불행은 우리의 떳떳한 만족감을 절대로 침범할 수 없습니다.”
“누구시라 하였소?”
왕이 물었습니다.
“제논이라 하옵니다. 스토아 지역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 구석에서 준엄한 어조의 말소리가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들려 왔습니다.
“맞소이다. 나는 내일 지구가 무너져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소!”
스피노자 사과나무였습니다. 오랜 회의 끝에 왕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신들은 왕의 결단에 절대적인 찬동과 지지를 하였습니다.
“내가 직접 포도나무 성을 찾아가겠소. 가서, 그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여 왕국에서 떠나게 하겠소!”
6.
“우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대왕. 이렇게 왕림해 주셔서 영광중의 영광이옵니다.”
포도나무 왕은 성을 찾아 온 사과나무 왕을 두 팔을 벌리며 호탕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포도나무 성의 사과나무 왕에 대한 환대는 극진했습니다.
성 밖에서부터 붉은 레트카펫을 바닥에 깔았고, 디디는 걸음마다 맛있는 과일과 음식을 담은 접시를 아름다운 여인들이 무릎을 꿇고 권했습니다. 악사들은 멋진 포도 넝쿨과 잎사귀로 옷을 해 입고, 왕이 도착해서 성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감미롭고 이국적인 선율을 끊임없이 연주했습니다.
성안은 휘황찬란했으며 화려한 샹들리에와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사과나무 왕은 내심 놀랐습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냉철한 이성과 성찰로 스스로를 진정시켰습니다. 포도나무 왕이 통 크게 사과나무 왕을 두 팔을 벌려 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왕. 이 레드카펫 좀 보십시오. 이 붉고 향기로운 카펫을. 이것이 대왕님을 환영하는 진짜 레드카펫이옵니다.”
“오. 감사합니다. 진짜 레드카펫이라니... 레드카펫에도 진짜 가짜가 있습니까?”
“아. 레드카펫의 유래를 말씀드려야겠군요. 예전에 아르테메스 신이 하늘에서 성으로 들어 올 때면, 우리는 물로 깨끗이 길을 청소하고 신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는 몹시 가물어서 물로 청소를 할 수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귀한 포도주로 길을 청소하고 신을 맞이했습니다. 길이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었지요. 신이 왜 길이 붉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들었을 때 신은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신이 오시거나 귀한 손님이 오시면 붉은 주단을 깔아 맞이하는 관례가 생겼답니다. 오늘 대왕께서 밟으신 그 레드카펫은 포도주로 물들인 카펫입니다. 진짜 레드카펫인 것입니다. 하하하하....”
포도나무 성의 환대는 훌륭하였지만, 사과나무 왕은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왕은 이들이 떠나기를 바라고 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화려한 만찬이 끝나고 두 왕은 진지하게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습니다. 사과나무 왕의 말은 이성적이고 냉철했습니다.
“우리 사과나무 왕국은 그간 합리적인 사고로 절제되고 모범적인 삶을 살며 진정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추구해 왔었소. 그런데 최근 포도나무가 늘어나면서 음악과 술과 무희들의 춤이 왕국을 물들이고 있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희노애락이 삶의 목적인 양 행복을 쾌락으로 추구하는 포도나무들의 삶의 방식을 우리는 찬동할 수 없소. 우리 왕국의 백성들을 변덕스런 감정과 물거품같은 쾌락으로 타락시킬 수는 없소이다. 감히 말합니다. 포도나무의 삶의 목표를 바꾸시든가 아니면 다른 왕국으로 떠나시오.”
포도나무 왕은 사과나무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사과나무 왕의 준열한 표정을 보면서, 포도나무 왕은 호탕하고 그러나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과거에 나는 사과나무 왕국의 이성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동경했었습니다. 이성적인 삶이 백성의 삶의 기준을 얼마나 고상하게 높여 왔는지, 또 마음의 평정과 평등한 삶의 질을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유심히 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삶이 생각대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수많은 세월을 겪고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포도나무 왕은 사과나무 왕을 넌지시 바라다보았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소이까? 그 알량한 이성으로 삶과 자연의 이치를 어디까지 알 수 있었소이까? 오히려 저마다 이상(理想)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참혹한 지옥으로 빠뜨렸습니까? 사람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을 가장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성이었지 않습니까? 이성, 이성하며 자기집착에 빠져 턱도 없는 이상(理想)을 내세워 이념이니, 교리니, 원리니, 이치니 하며 잔악하게 몰아대는 이(理)자 들어가는 단어에 나는 이골이 나고 말았소이다. 그래서였던 것이었소이다. 신이 왜 이성을 깨우치는 사과나무를 먹지 말라고 그토록 아담에게 신신당부했는지....아시겠소? 신을 어긴 죄악의 업보를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소이다. 그런데 그 알량한 이성을 위해 우리를 떠나라고요? 그것이 사과나무 왕국의 진정한 이성이오? 대왕?”
사과나무 왕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포도나무 왕을 쏘아보며,
“당신들이 추구하는 삶이란 그렇다면 무엇이요? 눈앞의 즐거움만 있으면 만족하는 배부른 돼지같은 삶이요? 아무런 고민도 없는? 희노애락의 감성이 지배하는 순간의 행복이 당신들이 추구하는 바였소?”
“우하하하... 그렇다면 사과대왕. 생각해보시오. 신이 왜 사과열매는 따먹지 말라 하면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와인이 되는 포도열매를 주시는 축복을 내리셨겠소? 이성이라는 교만함으로 저질러지는 어리석고 불행한 비참함을 와인으로 위안해주시기 위한 사랑이 아니겠소? 우리는 그래서 온 것입니다. 사과나무가 있는 곳에 반드시 있어야 할 나무는 포도나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아니오, 아니오. 그것은 논리가 뒤바뀐 궤변이요. 이성이 교만으로 왜곡된 것은 감정이 이성에 개입되면서 이성적이었던 사람들이 감성에 치우친 맹신적인 사람들로 변모한 탓 때문이오. 가장 이성적이었던 백성이 감정에 휩싸여 600만의 동족을 학살한 것이 이성이었겠소? 몰이성적인 군중들의 감정 때문 아니었겠소? 당신들은 오히려 이성적인 삶을 해쳐왔단 말이요. 안 그렇소?”
“사과 대왕. 당신들은 이성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결국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겸손하시오. 두려워 할 줄 아시오. 우주를 만든 신이 있소이다. 신의 존재를 느끼고 신과 교감하는 신비한 능력이 사람 속에는 있습니다. 부인하시겠소?
바로 영성이라는 것이오. 감성을 통해 우리는 영성을 체험하오. 우리는 신이 만든 자연의 일부로서 신과 통하는 안테나를 마음속에 높이 세워야 할 것이오. 겸손할 때야말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이성을 발휘하는 때 아니겠소? 우리는 그 감성과 영성을 겸허하게 대리하오. 와인이라는 상징으로서... 보다 더 겸손하시오. 신을 두려워하시오.”
“포도 대왕. 바로 그 영성이라는 것으로 이성을 억누르고 사람을 지배했던 시대가 중세의 암흑기였소. 그곳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이성으로 다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문명세계를 만들어갈 때 사람들은 이성의 부활을 외쳤고 휴매니즘과 인문주의로 비로소 행복을 정의할 수 있었소. 행복은 모든 감정을 이겨내는 이성이 승리할 때만이 도달하는 것이라오. 그곳이 천국이고, 그것이 열반이오. 신은 죽었소이다. 시대를 거슬러 되돌아갈 수는 없소. 당장 떠나시오. 미래는 더욱더 이성이 활발해지는 과학의 시대요. 경고합니다.”
사과나무 왕은 차디찬 직선으로 말한 후, 자리를 박차고 포도나무 성을 나왔습니다.
7.
사과왕국의 왕은 포도나무의 성을 방문한 후 대신회의를 주재했습니다. 회의는 무겁고 단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왕은 결기에 찬 어조로 말했습니다.
“포도나무의 방종을 더 이상 지켜 볼 수는 없소이다. 그들은 왕국의 도덕성과 우리가 지켜온 전통적 가치를 말살하고 있소. 나는 용납할 수 없소이다. 전쟁을 선포하고자 하오.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옳습니다. 이성은 냉철한 것입니다. 이성의 힘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장수들과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포도나무와의 전쟁을 지지하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때, 흰머리를 흩날리며 한 노인나무가 손을 저으며 왕에게 외쳤습니다.
“아니됩니다. 아니됩니다. 전쟁은 아니됩니다. 전쟁을 하면 우리는 필연코 패배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모든 귀족들의 눈길이 노인에게 향하였습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노기에 찬 어조로,
“우리가 패배한다고? 근거를 말하시오!”
“이성은 감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성은 얼음이요, 감정은 불입니다. 감정의 불꽃에 이성이 어떻게 녹지 않겠소? 이성은 양심의 맨 밑바닥에 있어서 감정이 다 소진되었을 때 비로소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민주도시 아테네의 백성조차 낮잠을 자는 나귀의 안일함을 깨무는 등에를 죽여 버렸소.
소피스트들의 달콤하고 열정적인 감성에, 나, 귀찮은 이성의 등에는 여지없이 짓이겨져 독배를 들고 만 것이었소.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감정이라는 잎사귀를 한없이 무성하게 키울 뿐이외다. ‘악법도 법’이라며 수용한 것은 끝까지 이성의 씨앗을 남기고자 했던 차디찬 이성의 행동이었소. 감정과 맞붙으면 패배하오. 전쟁은 아니됩니다. 역사가 그 증거요...”
“당신은 누구시오, 도대체?”
“소크라테스라고 하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소크라테스 나무를 차디차게 쏘아보았습니다. 윌리암 텔 사과나무가 허리에 찬 칼과 활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이성은 칼집 속에 든 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 말대로 패배할 것이오. 행동하는 이성의 힘을 보여주어야 하오. 이성의 무서운 맛을 보여주지 않으면 정의는 무너질 것이요. 그런 나약한 말은 집어치우시오! 나는 내 애인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쏘아 맞혔소. 야수와 같은 이성으로 말이요!”
소크라테스나무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행동하는 이성? 이성이 행동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그것은 감정이 되오. 이성은 사색이고, 통찰이요. 행동은 감정이 하는 짓이오. 인내심으로 교육하고 설득할 때 이성이 이길 수 있소. 시간의 여신은 언제나 이성의 편이오. 참으시오. 전쟁을 생각지 말고 대화하는 행동을 보여주시오. 그것이 행동하는 이성의 참 모습이라오.”
그러나 왕은 단호했습니다.
“무력하고 답답한 이성.... 그런 모습에 백성들이 사과나무를 심으려 하겠소? 저들은 오감뿐 아니라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정복하려 하는데, 우리는 사색과 대화로? 나는 참을 수 없소. 전쟁이오. 전쟁을 선포하오!”
왕과 모든 장수 대신들은 궁전 바닥을 발로 쿵쿵 구르고 환호와 구호를 외치며 전의를 다졌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궁정을 나올 때, 한 사과나무가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처럼 되뇌었습니다.
“그래도 이성은 감정에게 진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나무였습니다.
8.
전쟁이 선포되면서 왕국은 어수선해지고 두 갈래로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사과나무의 장수들과 포도나무의 귀족들이 왕국의 백성들에게 서로의 나무를 심으라고 외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과나무를 심으십시오. 과학과 이성의 열매를 맛보시오. 혜성을 보고 재앙과 모반의 별이라 하여 두려움에 떨면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미신을 기억해보시오. 과학이 그 두려움을 ㅉㅗ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행성이라 밝히지 않았습니까? 이름 모를 병을 귀신이 붙은 것이라 부적을 붙이던 것을 의학이 완치시키지 않았습니까? 이성을 잃으면 생명을 잃는 법이요. 사과나무의 이성을 마음에 심으십시오.”
핼리혜성의 출현주기를 계산했던 뉴턴 사과나무가 이렇게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이데아, 이데아... 세상의 법칙과 원리를 잊지 마시오. 자식의 중병을 고칠 의사를 고르면서 그가 무엇을 전공했는지,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그 능력을 따지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소?. 잘 생겼는지, 고향이 어딘지, 키가 큰지를 보고 자식 수술할 의사를 고르는 어리석은 부모가 어디 있겠냐 말이요? 그런데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사회의 중병을 고칠 지도자를 고를 때는 능력과 경험은 보지 않고, 잘 생겼는지, 고향이 어딘지, 키가 작은지 큰지, 잘 노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본단 말이요? 이성을 버리고 감성과 기분으로 판단하면 우리의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죽는단 말이외다. 지금 사과나무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성의 사과나무를 심으십시오. 이성의 백성이 되시오. 여러분...”
플라톤 나무도 확성기를 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사과왕국의 화가인 고야 나무가 나섰습니다.
“ 여러분. 잠에서 깨어나시오. 아침을 맞이하시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 법이라오. 간밤의 꿈에서 깨어나시오. 이성과 결합되는 상상만이 창조를 낳고 경이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이성을 베고 잠들지 마시오. 괴물의 자식이 되지 마시오. 어서 잠에서, 어서 꿈에서 깨어나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사과나무에 맞서 포도나무 측에서는 대형 마이크를 사용했습니다. 유명한 소피스트 나무들이 앞장섰습니다.
“이성...민주주의의 이성을 믿는 자들이여, 당신들에게 묻겠소. 인권에 우열이 있소? 개인의 생각에 가치의 서열이 있소? 왕도 한 표. 하인도 한 표. 이것이 민주주의의 이성 아니겠소? 지금 백성들을 보시오. 포도주에 열광하고 있지 않? 이성을 외치는 잘난 사과나무에게 힘없는 서민들이 환호하는 포도나무가 왜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이요? 왜 다수가 소수에게 배척되어야 한단 말이요? 포도나무를 심읍시다. 한 표씩만 행사해주시오. 우리는 승리하오. 다수결에 의한 민주적인 승리...!”
소피스트들의 연설에 대중은 열광하였습니다. 언제나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희들과 춤을 추며 동행하는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포도나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하하하하... 이성은 고귀하고 유식한 사람들이나 즐기라고 하시오. 희망도 없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하층의 서민들이여, 철들기 싫은 젊은이들이여, 힘없는 여성들이여, 모두 나에게 오시오. 가까이 오시오. 달콤한 생명의 물 포도주를 한 잔 하시오. ‘신의 물방울’을 마십시다. 세상의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시오. 취한 세상이 내 세상이요, 낙원입니다. 세상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오.”
디오니소스 나무는 와인 잔을 높이 들며 브라보를 외쳤습니다. 톨스토이의 루시퍼 포도나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사과(Bad apple). 사과는 썩으면서 에틸렌을 분비해 다른 과일들도 썩게 만듭니다. 우리사회가 병든 한 알의 이념 때문에 온 과일이 썩어가는 암적 존재를 심어서는 안됩니다. 역사를 보시오. 여러분. 혁명이라 외치는 자들은 다 나쁜 사과(Bad apple)였다오. 이성을 외쳤지만, 그들은 결국 자기를 위한 혁명에 빠지고 말았소이다. 그들을 경계하시오.”
양측의 싸움을 보면서, 왕국의 지성인이라는 논객들은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이성이 딱딱한 고체라면, 감성은 부드러운 액체입니다. 이성은 원칙으로 따지지만, 감성은 포용함으로 풀어갑니다. 이성은 결과로 평가하지만, 감성은 과정을 바라봅니다. 이성은 현실의 만족을 찾지만, 감성은 내일의 꿈을 꿉니다. 이성은 충고하지만, 감성은 격려합니다. 이성은 미래를 예측하지만, 감성은 추억을 그리워합니다.”
왕국은 날이 갈수록 더욱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이성과 감성 중 무엇이 중요한지 논쟁하다 다툼에 이르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한 사람의 다툼이 폭행으로 번졌고, 집단으로 커지면서 폭력으로 변했습니다. 양쪽의 집회가 연일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횃불도 촛불도 밤마다 등장했습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성파와 감성파... 거기에 이성도 감성도 중요하지 않고 신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영성파도 합류했습니다. 왕국은 점점 사분오열되어 갔습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성과 감성과 영성이 모두 공존하며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습니다. 어딘가의 한 편에 서지 않으면 양쪽으로부터 습격을 받았습니다.
9.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과나무와 포도나무의 대왕들은 놀라운 보고를 받았습니다. 서로 자신의 나무를 심자는 경쟁이, 상대편의 나무를 뽑아내는 투쟁으로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격앙된 백성들이 밤이 되면 사과나무를 심자며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포도나무를 심자며 사과나무를 뽑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성이 격앙되자 극도의 감정으로 치달아지고, 감정이 고조되자 잔혹한 실행으로 급변하였습니다. 서로간의 공멸의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상대방의 나무를 뽑아내기 시작하면서 경쟁에서 비난으로, 비난에서 복수로, 복수에서 저주로 이어갔습니다. 사과나무도 포도나무도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극심한 혼란 속에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감성적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분열이라는 금은 늘 침몰하는 배의 옆구리에 나타나는 조짐이었습니다. 왕국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습니다. 사과나무 왕은 멸망하는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경의 말이 맞았소. 이성이 행동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감정이 된다는 말... 이성은 감정과 맞붙으면 패배한다는 말... 맞았소. 왕국의 지성들은 지금 다 숨고 있소. 포도나무의 감성은 갈수록 뭉쳐지고 있소이다. 다중의 힘으로...이성은 사과의 씨앗과 같은 것이었소. 이성의 농부들만 씨앗을 소중히 할 뿐, 백성들은 달콤한 과육만 좋아하오. 우리는 이기지 못하고 있소. 앞으로 더 질 것이오.”
사과나무 왕은 비로소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서히 왕국은 파멸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화....대화....인내....인내.... 번민에 빠진 사과나무 왕은 ?인·의·예·지? 장군을 비밀리에 불렀습니다.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사과나무 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포도나무 대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뽑혀나가는 포도나무로 인해 취해야 할 감미로운 와인도 메말라 갔습니다. 와인이 없는 감성의 지구력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잠 못드는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저녁 성문을 두드리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성안의 그림과 건축을 책임지고 있는 예술의 거장, 세잔느 나무가 허리에 포도나무 지팡이를 짚고, 손에는 사과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잔느 공. 공이 왠일이시오. 이 밤에... 사과를 들고 서서...”
세잔느 나무는 잠시동안 말없이 왕을 응시하다가 말했습니다.
“대왕님. 이 사과를 보시오. 어떻게 보입니까?”
왕은 세잔느 손 위에 놓여있는 사과를 바라보았습니다. 반쪽이 빨갛게 익은 사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대왕의 눈에는 이 사과가 빨갛게 보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과가 보라색으로, 또 노란색으로 보입니다. 검은 색으로도 보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시각이 다르면 사과는 다른 모양이 됩니다. 각기 다른 시각의 사과를 그릴 때 사과들은 입체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생동감과 역동감이 살아나며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대왕님. 눈에 보이는 감각만으로는 입체감을 그릴 수 없습니다. 이성의 시각으로 보아야 보입니다. 사과나무와의 싸움은 우리가 단기간으로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겨서는 안됩니다. 사과는 빨갛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각도의 빛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성의 빛이 죽을 때, 포도나무의 열매들도 나중에는 말라비틀어질 것입니다. 전쟁을 멈추십시오. 감성이 이성을 이겨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기는 것이 지는 것입니다. 대왕...”
포도나무 왕은 세잔느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말을 건넨다’라는 칭송을 받으며 미술의 역사를 새로 썼던 화가였습니다. 세잔느 포도나무가 물러간 후, 포도나무 왕은 더욱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희·노·애·락·애·오·욕?여인들을 은밀히 불렀습니다.
왕국의 두 왕의 지령에 의해 포도나무 성의 ?희·노·애·락·애·오·욕?여인들은 사과나무 왕국의 ?인·의·예·지? 장군들과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사과와 포도나무의 왕은 서로의 밀사를 통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번에는 사과나무 왕이 포도나무 왕을 왕국으로 초대하였습니다.
10.
사과나무 왕궁은 포도나무 성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돈되고 견고했습니다. 대칭형의 건물.. 기하학적인 문양.. 과학에 기초한 첨탑... 모든 구조가 효율적으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최대한의 햇빛이 들어오는 천창과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창문... 사과나무 향기가 은은히 풍겨 들어왔습니다. 왕궁은 정원이 아름다웠습니다. 높게 솟아오르는 분수, 작은 소리로 말해도 크게 들리는 회랑, 햇빛의 방향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벽화.., 온갖 곤충과 새, 꽃, 나무, 연못... 자연의 작은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은 섬세함에 포도나무 왕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포도나무 왕이 작게 소리쳤습니다.
“오, 여기가 전설로만 들었던 에덴의 낙원이군요. 사과나무는 이곳에 있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신은 바로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꿈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이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더군요. 사과나무를 따먹고 눈이 밝아지면서 이성(理性)으로 이런 정원을 만들고자 했습니다만, 사람들은 이기적인 눈도 밝아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처럼...”
사과나무 왕은 지난번 포도나무 성을 찾을 때와는 얼굴빛이 달랐습니다.
“오늘은 정직하게 말을 하고 싶군요. 이성적으로...”
사과나무 왕의 눈빛을 보면서 포도나무 왕도 말했습니다.
“솔직하게...저도 감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사과나무 왕이 말했습니다.
“부끄럽군요. 이성을 가진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뉴턴이 옳았습니다. ‘천체의 움직임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던... 대왕의 말씀처럼 이성으로 무엇을 이루었나 나는 회의하고 있습니다. 고작 물리나 수학, 과학적 발견 이외에... 지금 우리 왕국의 이성의 사과는 세 조각이 나고 말았소이다. 은둔의 이성, 반감의 이성, 변절의 이성... 양심을 가진 이성은 전쟁을 피해 은둔하고 있고, 피끓는 이성은 열정에 불타 반론의 화신이 되어 버렸고, 합리적 계산에 밝은 이성은 기울어져 가는 왕국을 배신하며 변절하고 있소이다.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신념으로 출발한 이성이, 이상(理想)이 관철되지 않자 변모하는 이 모습을 나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결국... 이성이 감성을 이길 수는 없나 봅니다. 이기적 존재로서... 스토아 철학자 나무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이성에 의한 흔들리지 않는 행복... 우리의 이성이 과연 본능과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저는 회의가 듭니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고 하는 말은 이성이 그렇게 나약한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낙심하고 있소이다.”
사과나무 왕은 냉철하고 정직해 보였습니다. 포도나무 왕은 놀랐습니다.
“오. 대왕이 정직하게 말씀해주시니... 대왕. 저도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이념과 원리에 집착하는 이성의 모습을 볼 때, 저는 포도나무 성의 백성은 결코 자기의 이성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독선자가 되게 하지 말자는 목표를 세웠었습니다. 감정에 솔직하고 본성을 속이지 않는 선한 왕국을 만들 것을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사과나무 왕국과의 전쟁에서 저는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감정에 충실한 백성들은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 부족했습니다. 개체를 넘어 전체를 보는 시야가 없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자신도 모를 구호를 외쳐대곤 했습니다. 인내심도 부족했습니다. 변덕도 심했습니다. 디오니소스 나무나 포퓰리즘 나무가 불어준 감성의 바람으로 포도나무의 승리를 말하고 있지만, 그 후 어떤 비극이 초래될지 저는 지극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 옳은 것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포도나무 성 안은 이기적이고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그때 시간이 가면 다시 사과나무를 심자 하겠지요.”
포도나무 왕도 솔직하고 담백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과나무 왕 또한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왕이 이토록 이성적인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사과나무 왕국의 백성들은 솔직하지 못하답니다. 이성을 말하지만 합리적 사고라 말하는 것이 더 옳겠지요. 합리화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답니다. 겉으로는 예의를 지키지만 내심은 마음 다른 편에 있지요. 냉철함이 미덕이라서 따뜻한 정도 없습니다. 이론과 논리가 발전했지만, 그 속에서의 경쟁은 피를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저는 깨달았답니다. 우리 백성들은 결국 계산에 빠져 우유부단이라는 패배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정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아닙니다. 대왕. 저는 감성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성이나 감정은 한줄기 광풍같은 것입니다. 바람이 몰아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어이없는 광풍의 체험을 종종 겪곤 했습니다. 비록 이성적인 자세를 가지려 해도 광풍은 이들을 사정없이 꺾어버렸고, 역사는 암흑의 회오리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곤 했습니다. 결국...결국... 훗날 뼈저린 후회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밝은 이성이 어둠의 세월 속에 묻혀버린 역사...흑역사(黑歷史)라 하지 않습니까? 이성의 시간은 태양처럼 다시 떠오릅니다. 이성이 최후의 승자일 것입니다. 위대한 문명은 이성을 가진 백성들만이 맛보는 열매입니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사과 대왕...”
두 왕은 비밀스런 만남에서 서로의 약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약점을 시인하는 것에 신뢰가 싹트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용기라 생각되었습니다.
“용기란 이성의 아들입니다.” “아닙니다. 감성의 아버지지요.”
서로를 존중하면서 두 왕은 공감했습니다. 사과나무 왕이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점도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사과나무가 없었습니다. 사과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물이 부족한 메마른 곳이지요.”
“오...그렇습니까? 포도나무는 사막과 광야가 있는 지방에서도 잘 자라지요. 포도주는 물이 없는 곳에서 생명같이 여겨왔답니다. 그러니 신의 은총이라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물이 많은 곳과는 다르지요.”
“아, 우리는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만났군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같은 점이 있군요. 이성과 감성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같다는 것. 두렵게도.... 그 곳은 ‘승리속의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완전치 못한 존재입니다. 서로를 이겨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오호.. 우리는 반쪽이었습니다.”
“동감입니다. 감성이나 감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수가 옳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옳은 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사과나무가 옳았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공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그간의 주장에 대해 반성하겠습니다.”
포도나무 왕은 사과나무 왕에게 사과를 하고, 사과나무 왕은 포도주로 건배를 하였습니다. 사과나무 왕국과 포도나무 성은 상호 평화협약을 맺었습니다. 격렬했던 전쟁은 끝났습니다.
사과나무 왕국에 포도나무가 심어지기 시작했고, 포도나무 성에 사과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대왕은 협정을 맺었습니다. 왕국을 낮에는 사과나무 왕이, 밤에는 포도나무 왕이 지배하기로 했습니다. 사과나무 왕국에 포도나무 대왕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마지막 숙제도 해결하였습니다. 이성도 감성도 아닌 영성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사과왕국의 과학과 이성의 아이콘 뉴턴 사과나무가 결론을 이끌었습니다. 뉴턴이 말했습니다.
“저는 바닷가에서 더 특이하고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아다니는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앞에는 거대한 진리의 바다가 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한 개의 조약돌을 주웠을 따름입니다. 제가 그것을 주울 수 있었던 것은 더 멀리 볼 수 있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그 거인은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인과 싸울 이유도 없고 맞설 필요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고 세상을 보고 싶은 사람은 거인을 찾으면 되었습니다. 왕국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사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나란히 사이좋게 자라면서 생기는 것은 품격있고 풍요로운 역동이었습니다.
왕국의 백성들은 아침에는 사과를 한 알 먹었습니다. 그리고 일터로 나갔습니다. 창조(Creation)라는 일터에는 사과나무가 심어졌습니다. 일터에는 이지와 토론이 넘쳤습니다. 휴식(Recreation)이라는 정원에는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저녁에는 와인을 마셨습니다. 달콤한 와인이 마음의 외로움을 채웠습니다. 감성으로 이성이 다시 재창조되었습니다. 왕국의 백성들은 어느새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와인에는 진실이 있다. 우리는 늘 진실과 건배한다.” “진리는 일상 속에 있다. 우리는 늘 일상으로 신을 마주한다.”
■ 미노스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했습니다.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 자리나 거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입니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습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퇴임 후, 어린 손녀들에게 들려줄 동화를 만들어 달라는 딸의 부탁에 따라 온 가족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 주다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뛰어난 상상력과 유려한 문체가 돋보여 공직자에서 문필가로의 변신에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