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는 간략하게, 형편에 맞게”… 시대에 맞게, ‘법도를 따라서’ 되짚어야

홍동백서ㆍ조율이시는 엉터리?…제사는 공경이 바탕, 음식 논란보다 중요

가장 중요한 불천위제사 상이다. 경당종택의 경당 장흥효 선생을 위한 불천위제사 상이다. 고임 음식이 눈에 띈다. 소박하고 정성스럽다.
제사상에 바나나 올려도 되나요?

명절이면 자주 듣는 ‘단골 질문’이 몇 가지 있다. 좀 코믹한 내용인데 의외로 자주 듣는 질문 하나. “제사상에 바나나 올려도 되나요?” 몇 해째 듣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들으면, 죄송하지만, 속으로 웃음이 먼저 나온다. 상대가 진지하니 겉으로 웃을 수는 없다. 상대는 ‘음식 칼럼을 쓰고 음식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 제사 음식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라고 생각하는 눈치다. 그동안 상대가 겪었을 법한 과정이 빤하게 짐작은 간다.

제대로 대답을 해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나름 질문, 대답이 진행되었지만 아마 만족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유권해석’은 적절한 권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제사상 바나나’에 대해서는 권위자가 있을 리 없다. 연세 드신 연장자들은 ‘어디 그런 과일을!’이라고 했을 터이다. 본 적이 없으니 느닷없는 ‘바나나 제사상’이 생경스러웠을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어정쩡한 얼굴로 “올려도 되지 않을까요?”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 없는 얼굴로. 이런저런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바나나를 제사상에 올려도 된다, 라고 대답해주면 상대는 “그래요?”라고 반문한다. 여전히 얼굴은 떨떠름하다.

제사란 무엇인가? 조상에 대한 공경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이는 없다. 마음은 같으나 형식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마음이 형식을 앞선다고 배웠다. 마음은, 제사상에 무엇을 쓰느냐는 형식을 앞선다. 제사는 공경이 바탕이다. 시작이다. 바나나를 쓰든지 말든지 ‘공경하는 마음’이 앞서면 허용된다.

바나나는 대부분 수입과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을 귀한 제사상에?”라고 고개를 갸웃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음식 상당수가 이미 ‘수입’한 것이다. 지금 시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음식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전해진다. 우리 땅에서 변화하고 발전한다. 더러 사라지는 음식도 있다. 수입산 식재료라고 피할 이유는 있다. 제사에 관한 자료 중에 “이런 과일을 사용하고, 저런 과일을 사용하지 마라”고 적은 것은 없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지례예술촌'에서 종부가 제사상에 올리는 국수를 만들고 있다. 안동에는 아직도 제사상에 국수를 올리는 '국수제사'가 남아 있다.
기준은 있다. “돌아가신 조상이 제사상에 바나나 올리는 것을 좋아하실까?” 조상이 흔쾌히 받아들이시겠다고 믿으면 올려도 된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이라면 많이 올려도 좋을 것이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엉터리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를 이야기한다.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둔다, 제사상의 왼쪽부터 대추, 밤, 배, 감을 올린다”는 뜻이다. 엉터리다.

제사상 차리는 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오죽하면 “집집마다 제사상 차리는 법이 모두 다르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제각각 의견이 다른데, 희한하게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모두 받아들인다. 매스컴도 마찬가지.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매해 명절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내세워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되뇐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이런 자료밖에 없으니 죄다 ‘홍동백서, 조율이시’다. 조선시대 자료 중 어느 곳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홍(붉은 색)과 백(흰색)은 과일 껍질의 색인가, 아니면 과일 속의 색깔인가? 흰색 과일은 무엇일까? 사과는 붉고 수박은 푸르다(녹색). 참외는 대체적으로 노랗다. 푸른 참외도 있다. 바나나를 쓰는 이도 있고, 멜론을 놓는 이도 있다. 바나나는 대체적으로 노랗고 멜론은 녹색에 흰줄이 있다. 과일은 붉은 과일, 흰 과일로 가르기는 힘들다.

'세종오례의'의 제사상 진설도다. '조율이사'라는 과일 올리는 순서에 대한 내용은 어디를 봐도 없다.
‘홍백’도 수상쩍다. 우리는 오랫동안 ‘청’과 ‘홍’을 대비했다. 신랑, 신부를 이야기할 때 ‘청실’ ‘홍실’이라고 불렀다. 태극기의 원도 홍과 청으로 가른다. 하늘과 땅, 양과 음이다. 제사상에 ‘홍백’? 이상하지 않은가? 일본 방송사 NHK의 연말 가요제전 이름이 ‘홍백가합전(紅白歌合?)’이다. 홍과 백을 대비시켰다. ‘홍백가합전’ ‘홍동백서’.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조율이시는 더 엉터리다. <세종오례의(世宗五禮儀)>는 <세종실록오례의>다. 세종대왕 시절, 궁중과 민간의 모든 행사 진행하는 방법, 원칙 등을 정리한 것이다. 재사상 차리는 법, 제사 지내는 법도 포함한다. 조선 초기인 세종대왕 시절 시작하여 성종 때 <국조오례의>로 완성된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섰다. 모범 규범이 필요하다. 조선을 운영하는 기본 매뉴얼이다. <세종오례의> <국조오례의>는 조선말기까지 통용된다. 매뉴얼대로 운영한다.

<세종오례의>의 ‘진설도’에는 ‘대추, 감, 배, 밤’의 순서로 올렸다. ‘조, 시, 이, 율’이다. ‘조율이시’와는 전혀 다르다. 조율이시의 근거가 어디인지 궁금하다. 국가 운영 매뉴얼과 다른 내용? 당황스럽다. 조선시대 기록 어디에도 ‘조율이시가 원칙’이라는 말은 없다.

율곡전서의 내용 중 일부. '과일' 표기만 있고 구체적인 과일의 종류는 적지 않았다.
또 다른 의문도 있다. 감, 배는 과일이다. 밤은 과일이되 견과류다. 과일 중에서도 별도의 것으로 여긴다. ‘진설도’에는 호두도 있다. 실제 제사에 호두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호두도 견과류다. 왜 감, 배, 대추 등과 더불어 호두는 빼고 밤만 넣었을까? 크고 작은 의문투성이지만 도무지 설명은 없다. 근거도 없이 ‘홍동백서, 조율이시’라는 문구만 남아 있다. 아무도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설명해주지 않지만 전 국민이 ‘홍동백서, 조율이사’를 되뇐다.

제사의 방법이 달라졌다

흔히 돌아가신 기일에는 ‘기제사(忌祭祀)’고 명절에는 ‘차례(茶禮)’라고 말한다. 역시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사시제(四時祭)’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거의’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중월(仲月)’에 모시는 것이 사시제다. 중월은 중삭이다. 음력으로 계절 별 3개월 중 중간의 달이다. 대체적으로 2, 5, 8, 11월이다. 네 계절의 중간 달에 제사를 모셨다. 대부분 사라졌는데 늦가을, 겨울철의 사시제를 모시는 경우가 있다. ‘거의’라고 하는 이유다.

명절 차례는 말 그대로 차례다. 차 한 잔 놓고 모시는 간략한 제사(?)였는데 뒤섞였다. 기제사와 사시제를 섞고, 음식도 기제사처럼 거창해졌다.

더러 사라지고 더러 뒤섞였다. 오늘날의 기제사, 명절제사는 차례와 기제사, 사시제가 뒤섞인 것이다.

제사를 모시고 난 다음날 아침 밥상이다.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들이다. 나물, 국수, 탕, 국과 더불어 몇 가지 생선, 고기가 있다.(안동 경당종택)
‘제사 모시는 환경’이 달라졌다. 농경사회는 무너졌다. 농촌인구가 10%가 되지 않는다. 재래의 농촌도 아니다. 가족들, 친족들이 떨어져서 산다. 벌초를 대행하는 회사가 무수히 생겼다. 대리벌초가 시작되었다. 제사음식을 차려주는 회사도 생겼다. 차례, 기제사, 사시제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세월이 흘렀다. 식재료도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의 품종은 대부분 사라졌다. 고사리, 도라지 모두 재배, 양식한다. 배추, 무는 완전히 달라졌다. 주방의 조리도구들도 달라졌다. 식재료, 조리도구가 달라졌다. 사회 여건도 달라졌다. 제사가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우리 농산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맞다. 문제는 ‘우리 농산물’이라고 고집할 내용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밀가루의 경우 90% 이상이 수입 산이다. 전을 붙일 때 사용하는 밀가루는 거의 수입 산이다. 수입 바나나는 금하고 수입 밀가루는 사용한다? 이것도 어색하다.

전통, 전통을 지킨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무엇이 전통이고 무엇을 지킬까, 라는 의문이다. 예전의 예법을 복원하는 것이 전통이고 전통을 살리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육포와 한과 등이다. '관혼상제'에 사용하던 것이다. (사진은 덕유당에서 촬영한 것이다)
제사는 법도대로 지내야 한다. ‘법도’는 무엇인가? ‘법(法)’은 ‘물 수(水)’+ ‘갈 거(去)’의 합성자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치르는 것이 바로 ‘법도 있는 제사’다. 왜 홍동백서, 조율이시 같은 터무니없는 용어들을 고집할까? 물 흐르듯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제사를 모시면 된다.

차라리 명재 윤증을 따르자

명재 윤증(1629∼1714년)은 조선 중기의 선비, ‘산림거사(山林居士)’였다. 명재의 삶은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표본이라 할만 했다.

도두라진 유학자였던 명재가 남긴 말이 바로 “제사는 간략하게, 형편에 맞게”였다. 명재는 “나중에 형편이 어려운 후손이 나올 수 있다.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유과나 전을 사용하지 마라. 제사가 화려해지면 오히려 가난한 후손이 제사를 피할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 명재의 후손들은 제사상의 크기도 제한했다. ‘간략하게’라는 명재가 남긴 말을 실천한 것이다.

제사상이 화려해진 것은 엉뚱하게도 반상의 구별이 없어진 갑오경장(1894년) 이후다. 공식적으로 반상이 없어지니 ‘양반 가문을 나타낼 표식’이 필요해졌다. 화려한 제사는 ‘양반 가문’을 드러낼 좋은 기회였다. 상다리가 휘어지는 제사상이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해방 전후를 거치며 제사상은 점점 더 화려해졌다.

평범한 집안의 제사를 지내고 난 밥상이다. 몇 가지 나물과 탕, 그리고 생선이 보인다. 제사는 소박하되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한다. 화려한 제사상은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된다. 허례허식을 없애자는 것이 목표였지만 역시 군데군데 졸속행정이 드러난다. 워낙 허례허식, 사치가 심했다. 많이 줄이고, 새로 마련한 가이드라인도 허례허식, 사치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족 하나. 장례식에 입는 ‘옷’ 이야기다. 조상이 돌아가시면 후손은 거친 밥을 먹고, 거친 옷을 입으며, 거친 잠을 자야 한다.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굴건제복(屈巾祭服)은 거친 옷이다. 삼베와 새끼로 만든 옷이다. 새끼는 짚으로 꼰 것이다. 굴건제복은 제대로 된 갓[冠] 대신 거친 새끼 머리띠를 매고, 색깔과 무늬가 있는 일상의 옷 대신 무채색의 거친 삼베옷을 입는다는 뜻이다. 허리띠도 짚 꼰 새끼다. 이제 국산 삼베옷을 입는 것은 사치다. 수입산 삼베도 비싸다. 거친 삼베옷이 비싼 시대다.

상가에서 검은 양복을 입는 것도 전통도 아니고 제대로 된 개량도 아니다. 개악(改惡)이다. 우리 장례복장은 서양 것을 닮았다. 검은 양복 일색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무작정 일본을 통해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시대에 맞게, ‘법도를 따라서’ 어떻게 변화, 발전해야 할 지 되짚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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