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 공직자 출신 최민호 작가의 따뜻한 동화 이야기
1.
녀석이 또 나타나 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점원은 얼른 출입문을 열고 나가 녀석을 쫓았다.
“가! 어서 가. 왜 또 여기서 문을 막는거야! 얼른 가!”
소년은 점원이 나오면 늘 그랬듯 다리를 절름거리며 비틀비틀 저쪽으로 사라져야 했으나, 오늘은 달랐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는 쇼윈도 안의 여인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얼어붙듯 서 있었다.
“가! 어서!”
큰 소리로 주먹을 들고 위협하였지만 소년은 호통은 들리지도 않는 듯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인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더럽고 역한 냄새가 싫어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고 소리만 쳐대고 있는 점원과 아이의 실강이가 쇼윈도 밖으로 힐끗 여자의 눈에 띄었다. 아이는 야윈 몸에 거친 누더기를 걸친 노숙자 같았다. 다리를 절고 있는 듯 어깨 한 쪽이 기울어져 있었다. 아이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코 아이의 눈과 마주친 여성은 유리에 반사되고 있는 아이의 눈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여사장은 건반에서 손을 거두고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삼촌. 그 아이를 들어오라고 하세요.”
“안돼요. 가게에 냄새가 뱁니다. 지독하거든요.”
고급 피아노 판매 전문점이 즐비하게 서있는 거리. 매장 안은 조도 놓은 샹들리에 불빛 아래, 값비싼 고급 피아노에서 풍기는 고상한 락카 냄새와 악기들을 둘러싸고 있는 귀족 취향의 우아한 인테리어, 그리고 이지 리스닝의 클래식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여사장은 점원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매일 여기 오나요?”
“아니요. 이따금씩 와요. 가게도 많은데 꼭 우리 집 앞에 와서는 저렇게 한참을 피아노를 쳐다보고 가요. 어떤 때는 아예 쇼윈도 앞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릴 때도 있다니까요. 그래서 오기만 하면 쫓아내고 있어요.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가게 이미지가 있는데....”
“이상하군요.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한데....다른 집 앞에서는 안 그런다는 말이죠?”
“예. 이유를 물어도 말을 안해요. 조금 이상해요. 어디에서 온 녀석인지...”
여사장은 점원의 말을 듣고 손지갑을 꺼냈다.
“아이에게 주세요.”
“아니예요. 돈을 주어도 또 와요. 돈이 아닌 것 같아요.”
“목욕을 시키세요.”
“예?.....”
2.
며칠 후 아이가 다시 나타났다. 쇼윈도 앞에 서서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딘지 말쑥해 보였다. 점원이 소년에게 다가가 몇 마디 묻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이 들어와 여사장에게 보고하자 여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아이를 매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노숙자 특유의 더러운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름 옷도 얌전했다. 따뜻한 차와 과자를 주며 여사장은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우리 집 쇼윈도 앞에 왜 서있는 거지? 그리고.....,너 나 아니?”
아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런데 왜 그날 나를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어?”
여사장이 부드러운 말로 묻자 소년의 눈에 금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신히 입을 떼었다.
“엄마. 우리 엄마....”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엄마? 내가?...”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니 저 피아노요. 저 피아노. 엄마꺼예요.”
여사장은 의외의 눈빛으로 소년을 쳐다보며,
“엄마가 피아노를 치셨어? 네가 저 피아노를 아니? 저 피아노를?”
여사장은 쇼윈도의 피아노를 가리켰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왕관표시. 엄마꺼예요. 다른 집에서는 못 보았어요.”
여사장은 쇼윈도에 전시된 피아노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 조심스게 조율을 하고 반짝반짝 윤을 냈었다. 브랜드 마크로 왕관이 그려져 있는 피아노. 벡스타인(BECHSTEIN) 그랜드 피아노. 알프스 산 피하테 소나무와 독일 너도밤나무, 흑단 건반, 순모 사슴 가죽 액션으로 제작된 세계적인 명품 피아노. 드뷔시, 리스트, 루빈스타인이 소리에 반하여 전용으로 연주했다는 가격이 아닌 품격으로 아트 연주 홀이나 상류층의 피아니스트들이 소유하고 있는 벡스타인 그랜드 피아노였다. 매장의 품격과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쇼윈도에 전시해 놓은 피아노는 미지의 임자가 언제라도 최상급의 연주가 가능하도록 세심한 조율과 외장관리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네가 저 피아노를 안단 말이야? 벡스타인 피아노를?”
소년은,
“이름은 몰라요. 왕관이 그려져 있는 저 피아노...우리 엄마꺼예요.”
여사장은 의아한 마음에 차를 한잔 더 마셨다. 점원도 의외라는 듯이 아이를 주목하였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감돌았다.
“너의 집에 저 피아노가 있었단 말이구나. 엄마가 치는... 그런데, 그런데...지금은? 너도 피아노를 칠 줄 아니?”
“아니요. 몰라요. 엄마가 치는 피아노 건반에서 그냥 놀았어요.”
여사장은 점원에게 눈짓을 했다. 피아노를 치게 해보라는 것이었다. 점원은 매장안의 평범한 업라이트 피아노에 소년을 앉혀보려 하였다. 소년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다른 피아노는 몰라요. 저 피아노만....”
소년은 쇼윈도에 전시되어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켰다. 점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허어...개발에 편자라더니...”
그러면서도 혹시 하는 표정으로 여사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소년의 행동을 유심히 보던 여사장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피아노에는 한사코 고개를 젓던 소년은 쇼윈도에 있는 벡스타인 그랜드 피아노를 가리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왼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피아노 스툴에 앉자 소년은 엉덩이를 흔들어 자세를 편히 잡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도 대하는 듯 했다. 그리고 강아지 털을 귀엽게 쓰다듬듯 건반을 스르르 어루만졌다. 벡스타인 건반은 강아지가 주인의 손을 혀로 핥듯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 같았다. 소년이 손가락을 움직여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어떤 곡을 연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선율이었다. 그러나 멜로디에 화성의 조화가 있었다. 소년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손이 더욱 부지런히, 부드럽게 움직였다. 피아노에서 울려나오는 선율이 매장 안을 감싸고 흘렀다. 포근하면서 순조로운 자연의 선율이었다. 선율이 흐르면서 어느 덧 그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년의 가슴 속에 오래 된 회상이 냇물처럼 흘렀다.
“엄마....”
3.
넓은 거실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엄마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손을 거두고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서 눈물이 흘러 나와 건반에 떨어졌다. 아이는 피아노 다리에 매달려 놀고 있었다. 간신히 피아노 다리를 잡고 일어선다. 가느다란 왼쪽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옆구리에 왕관이 새겨진 피아노의 황금색 브랜드 마크를 코앞에 두고 아이는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 위에서 엄마의 피아노 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들렸다. 아이는 비를 맞듯 온 몸으로 피아노 소리를 맞으며 다시 간신히 일어서서 엄마의 손가락과 건반이 함께 춤추는 것을 보곤 했다.
엄마는 피아니스트였다. 엄마의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는 아이에게는 마음속의 자장가 같은 것이었다. 조화와 포근한 울림이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건반의 울림은 엄마의 마음을 울려주는 메아리 소리였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피아노 다리 속에 앉아 엄마가 움직이는 페달을 보며 조물락거리며 놀고 있노라면, 엄마는 느닷없이 피아노를 멈추고 피아노 밑에 있는 아이를 와락 안아 올리며 눈물을 뿌렸다.
“오. 불쌍한....진호. 하늘이 왜 너에게 이런 불행을....”
엄마는 볼을 부비며 진호의 왼쪽 다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늘 바쁘셨다. 진호는 엄마가 없을 때에는 피아노 스툴에 가까스로 올라 앉아 피아노 덮개를 열고 건반을 어루만지며 놀았다. 피아노는 진호의 아라비안 나이트였다. 건반은 마법램프였다. 건반을 누르는 대로 지니가 튀어 나와 지시에 순종하였다. 지니는 천둥을 불러주었고, 파도도 일으켜주었고, 살랑거리는 봄바람도 불게 했다. 낮은 숲 시냇물에서 놀다가 숲 속의 호수를 만나면 조약돌을 퐁당퐁당 던져보고, 높고 푸른 하늘이 보이면 종달새를 불러 지저귀곤 했다. 진호는 건반 위에서 엄마와 들에 나가 꽃을 따고, 누나, 아빠와 함께 피노키오가 춤추는 백설 공주의 오두막집에서 인어아가씨를 만났다. 피아노는 흰 눈 내린 검은 숲 속 나무 사이에 있는 진호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아빠. 누나... 언제부터인가 아빠와 누나의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했다. 진호가 학교에 들어가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부터였던가? 어느 날 엄마가 하루 종일, 아니 며칠간을 진호를 껴안고 울던 그때부터였던가?
“진호야. 진호야. 왜 하늘은 이렇게 너에게 불행을 주신다니....”
넓은 집에 진호가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엄마가 진호를 보면 한숨을 지으며 눈물 흘리는 일도 많아졌다. 불행. 불행은 불운과 고난이 함께 하는 것이었다. 아빠와 누나가 한꺼번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불운의 시작이었다. 저녁이면 종알대던 누나와 장난쳐 주시던 아빠가 없어지면서 집안의 바람이 서늘했다. 누나가 들려주던 아리비안 나이트 이야기도 더 들을 수 없었다. 넓은 집이 더 넓어졌고 피아노 소리는 더 크게 울려 엄마는 피아노 소리를 작게 하고 연주를 하곤 했다.
며칠간을 지노를 껴안고 울고 난 엄마가 일을 더 하셔야 했고 진호가 엄마의 피아노와 노는 시간이 더욱 길어지는 것이 고난의 출발이었다. 고난은 늘 돈과 몸에서부터 시작된다. 돈이 떨어지거나 몸이 아프면서부터이다. 진호는 학년이 높아지면서 점점 자신을 보는 시선이 차가워진다는 것을 느꼈다. 소아마비 걸린 부유한 집 소년에서 장애를 가진 가난한 집 아이로 시간이 갈수록 변해갔다.
엄마가 그렇게 아끼던 벡스타인 그랜드 피아노가 어느 날 없어졌다. 인부들이 피아노를 들어내는 동안 엄마는 고개를 돌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왕관이 그려져 있는 피아노의 바퀴달린 다리가 현관문을 완전히 빠져 나갈 때 진호도 오른쪽 다리마저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진호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엄마는 더욱 바빠졌다. 불행의 늪은 호리병처럼 깊어지는 것인가. 병 주둥이에 깔대기로 기름을 넣을 때처럼, 진호의 운명에 쏟아지는 시간은 깔대기를 통해 어김없이 고난의 병속으로 들어가 갇혀버렸다. 어느 날 엄마가 쓰러지고 말았다. 진호는 다리를 절며 밤새 엄마의 병상을 지켰다. 엄마는 진호의 손을 꼭 잡고 눈물만 흘렸다.
“진호야. 진호야. 너는 이제 어떻게 사니...? 누구하고 사니...?”
엄마는 복받치는 가슴과 메는 목구멍에서 마른 바람이 새어 나오듯 이 말을 되풀이하면서 눈물을 삼켰다. 엄마는 숨을 거두면서도 눈을 감지 못하였다. 눈물이 마르지 않던 그 눈으로 끝까지 진호를 쳐다보며.... 이제 철이 막 들기도 전의 일이었다. 고난은 모질게도 진호를 찾아 왔다. 진호의 운명에 자비심이란 없었다. 쓰나미처럼 까닭도 없이 고난의 파도는 진호에게 닥쳐왔다. 처음에는 보호자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덧 사라졌다. 진호는 보호 시설에 맡겨졌다. 계속되는 불행에 차라리 진호는 체념을 배웠다. 희망도 의지도 없어졌다. 장애인이라는 따가운 시선과 팔다리가 굵은 아이들에게 당하곤 하는 뭇매를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진호는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왔다. 왼쪽다리를 절름거리며... 불편한 다리를 끌고 다니면서 돈이 주어지면 돈을, 밥이 주어지면 밥을, 주먹이 주어지면 주먹을 받아들이며 거리에서 쓰러졌다. 노숙자가 되었다....
피아노의 선율 속에, 지나간 쓰라리고 외롭던 회상이 녹아 찬바람과 모진 서리가 둔탁한 저음에서 우는가 하면, 찢어지는 아픔과 괴로움이 고음의 못갖춘 리듬이 되어 귀를 아프게 했다. 피아노 위의 건반에서 움직이던 진호의 길고 여윈 손가락이 멈추었다. 눈물이 빗줄기처럼 흘러내려 손가락 사이의 검고 흰 건반 사이에 흘러 들어갔다. 연주,... 라기보다는 그저 건반위에서의 진호의 두드림이 끝났다. 고개를 숙이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진호에게 여사장이 다가왔다. 그녀는 진호의 등 뒤에서 어깨에 살며시 두 손을 얹었다.
“오. 얼마나 추웠으면,...,얼마나 외로웠으면....”
여사장은 진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선율에서 녹아 나와. 그 외로움과 쓸쓸함이...어쩌면 이렇게 마음을 울릴까. 이름이 뭐예요?”
“박, 박진호입니다.”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여사장이 멍하게 서 있는 삼촌을 불렀다.
“삼촌. 따뜻한 국물 좀 시켜 주세요. 얼마나 배고팠을까...얼마나 추웠을까?”
삼촌은 눈가에 눈물이 촉촉히 배어있는 여사장을 보면서 어이없어 했다.
“그 아이의 피아노에서 그런 것이 느껴집니까?”
여사장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가면서 삼촌의 무신경함을 나무라기라도 하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감이 가지 않으세요? 이 아이의 마음이?”
삼촌은 고개를 갸웃했다.
4.
여사장은 진호를 지노라 부르며 그날부터 매장에 나와 잔심부름을 시켰지만, 지노를 대하는 태도가 극진하였다. 여사장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지노는 천재였다. 왕관이 그려진 그랜드 피아노 소리는 지노의 뇌리에 유전자같이 인각되어 있는 듯 했다. 헝크러진 실타래를 눈이 가려내듯 그의 귀는 뒤섞여있는 음의 고저와 음색을 정확히 짚어냈다. 사물의 스치는 소리에서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에서도 그는 음을 들었다. 아니, 하늘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는 하늘이 들려주는 대로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것을 절대음감이라고 하기에는 귀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여사장은 지노의 이런 능력을 절대영감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를 공부하고 음악을 안다고 하지만 예술에는 천재가 있는 법이다. 타고난 천재를 어찌 당하랴... 푸시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를 만들면서 예술을 천재와 범인, 영감과 장인정신의 관계로 설정할 때 여사장은 한 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며칠 밤을 새우며 피나는 노력을 하여 얻는 한 줄의 멜로디를 모차르트는 장난치듯 그 자리에서 그려낸다. 애초부터 창조는 신의 영역이었고, 예술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앙증맞은 선물이었던 것이다. 음악을 그리도 사랑하는 나에게 신은 왜 좀 더 천재성을 주지 않았을까? 질투에 불타고 신에 대한 원망이 사무쳐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죽이고 싶었다. 여사장은 살리에르에게 공감하였었다. 그 살인의 열정에도 공감하였었다.
공감(Empathy). 이해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공감에는 몰입이 있다. 이해가 제3자적 관점이라면 공감은 당사자적인 제1자 관점이다. 당사자의 영혼에 몰입되는 것이다. 공감에는 진동수가 같을 때 멀리 있는 종이 치지 않아도 소리가 울리는 공명같은 것이 있다. 공감과 공명...
피아니스트의 성공은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천재를 보았을 때 히말라야 산맥을 만나는 것 같았다. 넘을 수 없는 산... 작은 콘서트는 석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욕심나는 큰 콩쿠르에서 1등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1등은 천재들이 차지하는 몫이었다. 신은 질투가 많은 절대자라 믿겼다. 인간의 영광을 질투한 신은 천재를 만들어 자신의 영광을 들어내고, 어김없이 고난을 부어 자신에게 무릎을 꿇게 하는 독선의 존재였다. 히말라야 산 밑에서 눈사태가 나듯 가슴이 무너지고 난 후, 여사장은 피아노 전문 매장을 시작했다. 영광보다 풍요였다. 전쟁보다 평화였다. 연주자보다 지도자의 길이었다. 다만, 천재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런데 지노가 나타났던 것이다. 지노의 과거를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그의 상처를 헤집기가 아팠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선율 속에 그의 과거가 가끔씩 울려 나오곤 했다. 피아노 랩소디처럼 흐르는 선율 속에서 엄마와 누나와 피아노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의 이야기와 피아노 선율은 울림이 같았다. 공명이었다. 지노는 누나를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헤라자드 왕비만큼이나 여기고 있었다. 동생의 이부자리에 함께 누워 엄마가 늦을 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누나. 누나를 교통사고로 잃은 어린 지노의 아픔은 피아노를 잃었을 때보다도 훨씬 큰 것이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누나는 얼마나 아팠을까? 누나의 아픔을 생각하면 지노의 왼쪽다리가 더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누나를 이야기할 때면 지노는 여사장을 쳐다보았다. 누나가 살았다면.... 이 분 같았을까? 새삼 누나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지노는 잔일을 하면서 여사장에게 피아노 조율을 배우기 시작했다. 명품 피아노는 각기 음색이 달랐다. 저녁에도 들을 수 있는 영롱한 이슬의 소리를 내는 스타인웨이가 있는가 하면, 독일의 철학과 미학이 섞인 정직한 벡스타인 피아노가 있고, 둥글고 화합의 음색을 지닌 앙상블의 여주인공 뵈젠로르퍼, 그리고 싹싹하고 예쁜 미소를 짓는 일본인의 친절한 야마하... 그들에게도 인격과 성품이 있었다. 그들의 인품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조율이라는 예술이었다. 매장의 구석진 악기 창고가 지노의 거처였다. 그 곳은 지노가 바라던 천국이었다. 언제라도 어루만지며 쓰다듬을 수 있는 피아노 건반이 있는 곳. 피아노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곳. 스툴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번쩍 들어 안아주던 엄마 꿈을 꿀 수 있는 곳....
아침에 출근하여 지노를 보는 것이 여사장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조율만이 아니고 지노에게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천천히... 바이엘과 체르니로부터... 그러나 천천히 되지는 않았다. 지노는 이미 배우고 태어나 있었다.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아 건반을 치는 여사장은 가슴이 뛰었다. 그의 성장속도와 한계가 어디까지 다다를지 신비스런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늘 신비하게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피아노 건반은 손가락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지노와 함께 있으면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피아노가 피아니스트를 연주시킨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지노는 피아노 앞에 앉으면 자신을 잊었다.
5.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불빛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로 매장을 장식하고 캐롤송으로 주변을 온통 울려 퍼지게 하고 나서 여사장이 지노를 불렀다.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예쁜 포장지로 싸여 있었다.
“풀어 봐. 선물이야, 오랫동안 기다렸어...”
설레는 호기심으로 포장을 뜯고 열어 본 상자 속에 삼단으로 접혀진 스틱이 들어있었다.
“......?”
“그래. 지팡이야. 지노가 다리를 절며 걸을 때마다 나도 다리가 아팠어. 그래서 부탁한 거야. 키에 맞을 거야.”
지노는 왼쪽 손으로 스틱을 짚고 일어섰다. 몸이 반듯하게 섰다. 걸어보았다. 똑바로 그리고 의젓하게 걸을 수 있었다. 이렇게 편하다니....키가 훌쩍 커진 것 같았다. 자세도 당당해졌다. 휘어져 보였던 세상마저 곧게 펴져 보이는 듯 했다. 손잡이 나무의 촉감이 너무도 부드럽고 아늑했다. 손잡이를 매만지며 들여다보았다.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왕관이야. 지노가 좋아하는 벡스타인 피아노의 상징. 벡스타인 피아노 회사에 주문했어. 피아노 사운드 보드를 만드는 피하테 소나무로 만든 것이야. 알프스 빙하의 혹한을 견딘 나무지. 그래서 아름답고 단단한 거야. 늘 짚고 다니도록 해. 의지하고 살아. 늘 손에서 놓지 마. 너를 사랑하니까...”
여사장의 선물에 지노의 눈은 눈물이 가득 맺혔다. 난생 처음으로 기대보는 지팡이.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사랑이었다. 지노는 여사장을 바라보았다. 불러보고 싶었지만, 불러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부를 수 없었던 이름. 단 한번만이라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싶었던 그리운 이름. 그 이름. 지노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누나...”
지노는 누나의 품에 안겨들었다. 다리를 저는 아픔을 이제껏 누가 공감해주었던가. 남의 아픔을 동정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가 내 아픔으로 공감해주었던가.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던가. 아픔을 단지 이해한다고만 할 뿐... 엄마는 지노를 붙잡고 그렇게 울었었다. 지노가 불쌍해서 울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노의 아픔이 엄마에게도 그렇게 아파서 그랬다는 것을 지노는 고난을 겪으면서 알았다. 누나는 지노의 아픔에, 그 아픔을 잊고자 지노를 위한 아라비안 나이트를 그토록 끊임없이 들려주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여사장. 디딜 때마다 아팠던 지노의 다리를 내 다리로 아파했다. 지노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피아노 누나...
6.
“누나. 그게 정말이야? 크리스마스 TV 특집에서 본 그거...”
“뭔데?”
“일차 대전때 영국군과 독일군 이야기...”
“해 봐.”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독일군과 영국군이 대치하던 벨기에의 아프르 전선에서 군인들이 서로 총을 겨누며 추위에 떨고 있었대. 그런데 영국군 참호에서 한 병사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작은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랬더니 다른 영국군 병사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큰 소리로 합창이 되었대. 그러더니 독일군 참호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거야. 독일 군인들이 모두 따라 부르고 이어서 프랑스, 스위스 전선의 병사들도 이어졌대. 그래서 크리스마스 기간 중 휴전을 하자고 합의하고 싸움을 멈추었대. 그리고 나서 모두 참호에서 일어나 축구를 같이 하고, 노래를 부르고, 희생자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무덤을 만들어 주면서 결국 세계 대전이 끝나게 되었다는 거야. 정말 멋지지? 정말 그랬을까? 전쟁이 노래 한곡 때문에 끝났다는 것이?”
“노래 때문에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음악이 수없는 생명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 캐롤이 없었다면 총을 계속 쐈을 테니까...”
“오...”
“그래, 지노야... 음악은 단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만은 아니야. 그보다 훨씬 크고 많은 힘이 있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 슬픈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대립과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마는 힘이 있어. 그것은 말이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다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언어야.”
누나의 말은 지노의 마음에 공명이 되어 깊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공감의 언어사야.”
지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나.... 음악이 지팡이가 될 수는 없을까? 다리가 아픈 사람이 꼿꼿이 설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지팡이... 어떤 빙하에도 견디어 낸 소나무로 된 지팡이가 되어 아픈 사람에게 든든한 의지가 되는 지팡이... 그것이 될 수는 없을까?”
누나는 지노를 바라보았다. 지노의 눈에 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신은, 육신의 지팡이가 필요한 지노를 사람들의 영혼의 지팡이로 만들기 위해 보내신 것은 아닐까? 혹한의 고통을 견디게 하면서?...
“지노...예술은 신의 영역이란다. 신이 주시는 선물이란다. 고난을 주어 겸손을 가르친 천재를 보내서 창조하는....”
지노의 눈이 빛났다. 피아노 연습은 날이 갈수록 열정을 더해갔다. 지노는 음악에 열중하면서 사람은 귀를 통해 영혼과 통하는 마음의 주파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주파수는 사람에 따라 폭과 영역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영혼이 공명하는 마음의 주파수대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를 공감대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공감대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영혼은 공명했다. 한 종을 치면 멀리 있는 다른 종들도 치지 않아도 저절로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종도, 이념도, 공간도, 시간도 공감의 영역에는 예외가 없었다. 함께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했다. 베토벤의 시대에도, 비틀즈의 시대에도, 레이 찰스의 시대에도 공감은 변함없이 확장될 뿐이었다. 지노는 피아노로 공감대의 영역을 확인했다.
7.
삼촌이 가게로 뛰어 들어오며 여사장에게 외쳤다.
“사장님. 이거 봤어요? 앤드류 김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요. 여기요...”
헐레벌떡거리며 포스터를 한 묶음 내놓는 삼촌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홍보 포스터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한다는 앤드류 김의 미소를 짓는 멋진 실루엣 프로필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아니, 여기요. 여기.”
삼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포스터의 사진은 앤드류 김의 프로필이 아니었다. 그 옆에 가지런한 흰 이를 뽐내며 네 개의 각선미를 자랑하며 쭉 빠진 피아노였다. 옆구리에 황금 빛 왕관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거잖아요. 이거.. 우리 쇼윈도에 있는 모델.. 이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거예요. 벡스타인 그랜드...누가 조율을 해야겠어요?”
삼촌은 여사장과 지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노도 여사장과 삼촌을 번갈아 보았다.
“앤드류 김이 누구예요?”
작은 목소리로 지노가 물었다. 피아노 누나의 설명은 이러했다. 앤드류 김은 음악가 아닌 음악가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 2세쯤 되는데, 새로운 영역의 음악을 창시한 예술가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여류 음악가였다. 그녀는 피아노 연주에 맞추어 노래 아닌 토크를 하는 예술가였다. 관중들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에 맞추어 피아노를 연주하는데, 연주자는 즉석 재즈 연주자라 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내용과 감성에 맞추어 즉흥적인 연주를 하는데, 기막힌 하모니를 이루어 객석의 관중들은 이야기와 피아노의 앙상블을 듣는 것이라 했다. 앤드류 김은 노래를 곁들이기도 하고 성우처럼 효과음도 구사하면서 자신이 설정한 이야기를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토크도 주제만을 정할 뿐 관객들을 보고 즉흥적으로 컨텐츠를 구사하여 관객의 공감을 얻어낸다는 것이었다. 만담도 오페라도 뮤지컬도 아닌 음악과 토크가 어우러진 새로운 장르의 공연으로 음악계에서는 천재만이 연출할 수 있는 예술이라 극찬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피아노 파트너도 천재 급의 연주자가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운 무대라고 했다. 앤드류 김의 이야기에 몰입되어 영혼과 영혼이 일체가 될 때 가능한 연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앤드류 김은 상호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전속 연주자를 대동하고 다닌다 했다. 앤드류 김은 한국어도 가능해 예술의 전당 공연은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한다고 포스터에는 쓰여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죠?”
“아무튼 무대 연주를 앞두고 피아노 조율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조율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겠지만..., 이번에 사장님께서 제안해 보시지요. 지노의 실력을 보자는 겁니다. 저 브랜드의 피아노라면 우리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 있겠어요? 우리의 자존심 아닙니까?”
일리가 있는 제안이었다. 지노의 실력을 보자... 여사장은 예술의 전당에 앤드류 김의 연락처를 물었다.
8.
무대에서 만난 앤드류 김은 우아했다. 기품과 매너를 동시에 갖춘 상류층의 고급스런 분위기가 풍겼다. 잔뜩 주눅이 들은 지노는 여사장의 뒤에서 나오지를 못했다. 드레스 리허설 전이라 수수한 복장의 앤드류에게 여사장은 자신의 프로필을 말하며 방문의 취지를 설명했다.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했지요. 지금은 벡스타인 피아노 한국 판매를 하고 있지만,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로 벡스타인 피아노 회사에서 조율을 한 적이 있어요. 이번 무대의 피아노 조율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여사장의 프로필은 나무랄 것이 없었다. 앤드류 김은 미소를 지으며,
“사장님보다 조율을 더 잘하실 분은 없으시겠네요. 그러나 피아노는 저보다는 제 파트너가 허락해야 해요. 피아노는 그 분이 치시는 거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시작해 보시죠. 피아니스트의 인정을 나중에 받는다는 조건으로요.”
쿨했다. 여사장은 인사를 하고 지노를 데리고 무대 뒤의 피아노를 향했다. 여사장은 자신이 아니라 지노가 조율을 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율은 공연의 작은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앤드류 김은 조율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시간을 갖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음향에 예민한 신경을 쓰면서 의자에 앉아 자기만의 리허설을 시작하고 싶어했다.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가며 그녀는 연습에 몰두하고 싶어했다. 아무튼 온도와 습도 무대가 변할 때마다 세심한 조율은 필요하다. 피아니스트 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나름대로 호흡을 하고 연주를 하는 것이다. 무대 뒤로 간 지노와 여사장은 피아노를 열었다. 가족처럼 익숙한 피아노였다. 마음을 안정시키자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지노는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건반을 쓰다듬고 조용히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의 응답은 정직하고 명쾌했다. 지노는 한음 한음 건반의 조율을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는 앤드류 김의 속삭이듯 부드러운 목소리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릴케의 시였다. 여사장은 오랜간만에 듣는 릴케의 시에 독일에서의 추억이 살아나는 듯했다. 손을 멈추고 앤드류의 리허설에 귀를 기울였다. 앤드류 김의 토크쇼는 과연 그 명성에 값하는 가치가 있었다. 그 호소력과 흡인력.. 감성 짙은 목소리가 무대 뒤로 들려오면서 여사장은 릴케의 다음 싯귀절이 저절로 기다려졌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앤드류의 토크는 계속되고 있었다. 릴케의 시를 다 읊자, 앤드류는 목소리를 바꾸었다. 관객을 향하는 것 같았다.
“사랑했던 한국의 가족 여러분. 오랜간만에 집이 없는 집에 찾아왔습니다. 늘 혼자서... 책을 읽고, 그리웠던 사람을 그리며...”
지노의 조율하던 손이 멈추었다. 숨을 멈추고 앤드류의 토크에 귀를 기울였다. 지노의 손가락이 다르게 움직였다. 떨어지는 외로운 낙엽처럼 건반 위를 굴렀다. 이어서 사르르 떨리며 그리움의 선율이 건반위에 드리워졌다.
“포도주가 익어가듯 저를 붉게 물들이며 오늘을 기다렸답니다....”
지노의 손가락은 건반을 두 손으로 감싸 안듯 흰 쟁반위에 붉은 색의 와인 잔의 곡 선을 그려냈다. 애달팠다.
“살아 갈수록 혼자가 되어가는 것을 아는 이만큼이 되어서 그리움이 무서워 눈물이 많아졌음을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지노의 건반이 흰색과 검은색이 교차되며 사다리가 올라가듯 아래에서 위로 춤을 추며 올라갔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굵은 선율이 땅을 타고 내렸다.
무대 위 앤드류의 토크는 조용히 계속되었고 무대 뒤의 지노의 피아노 연주는 말없이 따라 이어졌다. 여사장은 무대 사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앤드류 김의 토크에 공명하는 지노의 피아노 연주. 지노는 영혼이 이미 토크 속에 몰입된 듯 두 눈은 감기고 얼굴은 발갛게 붉어져 있었다. 앤드류 김의 토크는 강물처럼 흐르고, 지노의 손가락은 무희처럼 춤추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앤드류 김의 토크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무대의 휘장이 벌컥 열렸다.
“누구세요. 지금 피아노를 치는 분이....”
앤드류 김이 피아노 위의 두 사람을 노려보며 외쳤다. 앤드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누구세요. 릴케를 이해하고, 한국의 가을을 이해하는 이 깊은 감성을 가진 분이...”
앤드류는 여사장을 응시하고서는
“역시 사장님이시군요. 피아니스트... 역시 조율하실 분이 아닐 것으로 보였어요.”
그러나 여사장은 앤드류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그리고 무게있게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닙니다. 이 청년입니다.”
“그 청년? 조율 보조 말인가요? 저 청년이 피아노를 쳤다구요? 그 청년이 제 토크를 이해했단 말인가요?”
앤드류의 놀란 질문에 지노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릴케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쳤습니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공감했습니다.”
“.............”
“그 아픔이 저에게 공감되었습니다. 그래서...”
앤드류 김은 뚫어지게 지노를 바라보았다. 경외심이 서려있었다.
“오, 첫 눈에 알아보겠군요. 이런 천재가 한국에 있었다니... 저의 토크를 이토록 깊이 공감하며 연주하는 재즈 피아니스트를 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군요. 저를 아는 사람도 아닌 사람과 이렇게 공감할 수 있다니...”
앤드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토크를 하듯 말했다.
“마치 제 영혼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 같아요. 언젠가 어디서 만났던 영혼이 아니고서야... 저 청년의 연주를 더 듣고 싶군요.”
여사장은 가슴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지노...지노...지노... 이때 앤드류가 지노에게 물었다.
“이름이?”
“지노박입니다.”
“좋은 이름이군요. 참 좋아요. 연주를 계속해 볼까요?”
지노와 앤드류는 토크연주의 리허설을 끝까지 했다. 지노의 연주는 막힘이 없었다. 앤드류의 토크도 거침이 없었다. 두 즉흥 연주자의 감흥은 일치되고 있었고 공감대의 주파수는 동일하였다. 리허설이 끝나자 상기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박수를 쳤다.
“브라보! 금번 공연의 프로그램을 수정해야 될 것 같군요. 한국어로 공연하는 것으로요. 제 공연은 연주와 토크의 공감이 생명이니까요. 어때요? 지노박씨?”
“감사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앤드류에게는 만족한 리허설이었고, 지노에게는 기적의 데뷔였다. 앤드류 김이 어딘가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홍보포스터와 프로그램의 인쇄를 수정하라는 지시였다.
“다시 한 번 이름이? 지노박?”
“예. 그렇습니다.”
“...........”
앤드류 김의 시선이 비행기를 찾는 밤하늘의 서치라이트처럼 어지러워졌다.
“한국이름으로는 박 진호? 그런가요?”
“예. 그렇습니다.”
지노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이상스럽게도 얼음장처럼 얼어붙고 있었다.
“박진호씨. 한 번 일어서 볼래요?”
지노는 피아노 누나가 준 스틱을 왼손에 잡고 곧게 일어섰다. 앤드류는 고개를 저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진호. 진호... 아니야. 아니야. 진호는 일어서지 못했어....박씨?아니고...”
앤드류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돌변했다. 눈물을 폭포처럼 터뜨렸다.
“그 애는 일어서지 못했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을 하고는 앤드류는 눈물을 거두고 다시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앤드류의 급변하는 모습에 여사장과 지노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앤드류 김을 보고 지노는 여사장에게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나. 저 사람 누구예요? 이상해요. 진호가 일어서지 못하다니... 진호가 누군데...나도 진혼데...”
앤드류 김이 지노를 보고 말했다.
“죄송해요.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김진호라고. 한국에는 동명이인도 많으니까요. 한국에서 어딘가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그 아이도 피아노를 좋아했지요. 혹시나 해서 착각했습니다. 과민했나 봐요.”
여사장이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
“그런데 앤드류 김 여사님. 그 진호가 일어서지를 못했나요?”
“세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었답니다. 불치병이죠...그래서...”
“진호가 누군데요?”
“제 동생이었습니다. 어릴 때 헤어진...”
앤드류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앤드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사장이 지노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스틱을 가로챘다.
“지노. 일어서 봐!”
지노는 왼쪽으로 기울어지며 다리에 힘을 주고 기우뚱 일어섰다. 하얗게 질리는 앤드류 김의 얼굴....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9.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의 첫 구절을 기도문 외우듯 읊은 뒤, 앤드류 김은 여사장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아하고 기품있던 얼굴은 어디 가고 앤드류는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목소리는 가을바람에 가랑잎 뒹굴듯 메말라 있었다. 밤새 울고 또 울었었다. 지노를 부둥켜 안고서.
지노에게 아라비안 나이트를 얘기해주던 셰헤라자드는 교통사고로 죽었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니었다. 피아니스트 엄마와 문학 청년에서 극작가로 변신한 아버지는 두 분 다 재능이 풍부한 분이었다. 일가친척이 없는 피난민의 자손이라는 공감대가 두 분을 가깝게 했고 부유했던 부모덕에 예술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 곳은 외롭고 고단한 세계였다. 안주하기에는 재능이 아까웠고, 날개를 달기에는 신의 도움이 부족했다.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을 추구하던 두 예술가는 시간이 가면서 공감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피아노의 팽팽한 스팅만큼 긴장의 선 위를 걸었고, 아빠는 문학의 넓고 유연한 우주에서 유영의 여유를 사랑했다. 결혼 초의 단란하고 유복한 생활이 각자가 추구하는 세계의 주파수가 다른 만큼 불협화음은 갈수록 증폭했다. 선과 면의 공간상의 접점은 멀어져 갔다. 경제적인 핍박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너무도 순수하고 너무도 열정적이었다는 이유를 구실로 둘은 합의 이혼하기로 했다. 소아마비를 앓는 어린 아들은 어머니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딸은 아버지가 책임지기로 했다. 집과 피아노를 엄마에게 주고, 아버지는 딸만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아이들에게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로, 엄마와 아빠가 사랑이 깨진 실패한 부모라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로 약속했다.
고난의 시작이 가족 모두에게 찾아왔다. 아버지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미국에서의 초기의 어려운 삶을 이야기하기란 오딧세이처럼 길기만 하다. 딸에게 엄마와 진호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말했지만 딸은 내색하지 않았다. 딸은 이미 알 것은 알만한 나이였다. 부모의 상처를 이해할 만한 나이였다. 속아주었다. 아빠와 살면서 차라리 엄마는 잊혔다. 그러나 진호를 잊을 수는 없었다. 김진호....소아마비에 걸려 혼자 일어서기가 어려웠던 내 동생.... 피아니스트 엄마보다 장애인 동생이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의 아픔에 베개가 젖었던 적이 얼마였던가. 누나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았던 것 같다. 스토리를 만들어 토크공연을 하면서 피아노의 연주를 곁들였다. 그녀의 호소력 있는 토크공연은 언제나 성황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관객을 살폈었다. 다리는 절름거리며 진호가 무대로 뛰어올라 누나를 외치는 환상을 꿈에서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베개가 적셔졌다.
언젠가는 한국에서... 그녀의 공연은 한국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라도 오고 싶은 한국이었다.
“집이 없는 집으로...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포도주가 익어가듯 저를 붉게 물들이며 오늘을 기다렸답니다....”
이야기를 마친 앤드류는 엄마의 성을 따, 박진호로 변한 지노를 바라보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과장되게 웃었다. 눈물을 흘리며 앤드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여사장이 입을 열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군요. 그리고 공감이란 참 신기한 것이군요. 지노는 누나의 토크에서, 누나는 지노의 선율에서 어떻게 그렇게 쉽게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지 말이예요.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정말 그래요...영혼이 일치하지 않고서야...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공감되지 않고서야...기적이죠.”
“그렇지만 공감의 세계에서 기적은 일상인 것도 같아요. 제가 지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치는 피아노에서 그의 고통을 공감했었지요. 그것이 오늘에 이른 것 아니겠어요? 1차 세계 대전 때 병사 간 크리스마스 캐롤 한 곡의 공감이 총 부리를 겨누던 세계 전쟁을 끝냈듯이요. 그리고 오늘....남매의 만남이 이렇게 공감을 통해서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듯이... 있을 수 없는 공감의 기적이네요.”
“그렇군요. 음악은 공감의 언어라고 했던가요? 음악의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신이 선사하신... 아. 저 마음 또 바꾸었어요. 이번 한국 공연의 주제는 ‘공감’으로 할래요. 지노의 피아노 연주와 저의 스토리로 서로의 아픔과 슬픔이 공감되면, 관객들도 진정으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기적이 또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요?”
10.
토크 공연 ‘공감’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노박과 앤드류 김의 ‘공감’... 그들의 이야기와 피아노의 연주는 동정과 이해를 넘어 함께 아파하는 공감으로 온 사회를 공명시켰다. 공감에 동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극장 앞에 줄을 섰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습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불루의 ‘사막’이라는 시를 지노가 조용히 읊조릴 때면, 관객들은 가슴에 저며드는 지노의 외로움에 다 같이 눈물지었고, 누나 앤드류와 함께 재회의 기쁨을 하이톤으로 노래하면, 눈물도 마르지 않은 관객들이 객석에서 일어나 함께 춤을 추었다. 그 또한 기적이었다.
지노와 앤드류의 공연은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이 추구하는 관객과의 공감이라는 장르는 인간적인 유대감을 강하게 하는 인도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토크와 피아노 연주의 콜라보적 완성이라는 예술성의 측면에서도 획기적 진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그들이 벌어들인 수입으로 재단을 만들었다. 피아노 누나가 이끌고, ‘공감’의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기부하고 참여하는 공익 재단이었다. 재단의 이름은 ‘공감’이었다. ‘공감’ 재단의 목적사업은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첫째는, 세상의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희망을 주는 음악의 선사였다. 어디든, 누구에게든 ‘공감’ 공연단은 달려가, 손에 손잡고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껴안는 화합의 고리를 만들고, 한 목소리로 노래하며 용서하는 물길을 열고, 외롭고 힘든 자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든든한 지팡이가 되는 것이었다.
둘째는, 세상의 아픈 사람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치료하는 병원의 설립이었다. ‘공감’ 재단이 지원하여 설립된 병원 정문에는 지팡이가 그려져 있었다. 황금색 왕관이 새겨진 단아한 지팡이였다. 지팡이는 언제든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되었다. 곧고 당당히 짚고 일어 설 수 있는, 혹한의 추위에도 견뎌낸 알프스 빙하의 소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였다.
■ 미노스 프로필
본명은 최민호, 대전 출신으로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직에 입문해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행정자치부 인사실장에 이어 소청심사위원장,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국무총리 비서실장 등 차관급 고위직을 세번이나 거쳤다.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하고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일본 도쿄대학 법학석사, 단국대학교 행정학 박사를 취득한뒤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공직 퇴임 후 고려대·공주대 객원교수, 배재대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홍익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30여년의 공직생활 퇴임후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새움출판사)'라는 단편소설과 동화가 있는 이야기책을 출간, 동화작가로 데뷔했다. 단순히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童話)'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화(動話)'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온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