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한국 박준영 기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한국 정부의 고위인사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둔 대통령실은 '위조'에 방점을 찍고 사태를 진화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사실상 도·감청을 인정하면서 우리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11일(현지시간) 워싱턴 DC 인근 덜레스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 정보당국의 도청 의혹에 대해 "제3자가 개입돼 있으며,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미국 국방부 입장도 있고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섣불리 이야기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어떻다 하는 것은 우리도 시간을 갖고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앞서 김 차장은 전날 출국길에서도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대해서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같은날 대통령실도 공지를 통해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이 도청의 원인으로 용산 이전을 지목한 데 대해서도 "한미 동맹을 흔드는 자해행위이자 국익 침해 행위"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의혹이 위조됐다는 데 잠정적으로 결론을 냈지만, 문제는 우리 정부와 전혀 다른 미국 정부의 입장이다. 미국 정부는 기밀문건 유출 사실을 사실상 인정하고, 미국 국방부와 법무부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일부 미국 전문가들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사과까지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소리(VOA)는 이번 의혹과 관련한 8명의 분석을 전하기도 했다. VOA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7명은 한미 신뢰 관계를 손상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정치의 혼란은 가중되는 모양새다. 여당 내부에서도 정부를 옹호하는 측과 민심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국회 국방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이자 육군 중장(3성) 출신인 신원식 의원은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문건은 완전한 거짓말로 내용 자체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걸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며 “시간이 지나면 왜 틀렸다는 것인지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직전 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성일종 의원도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와의 인터뷰에서 "각국이 도청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라면서 "미국이 우리만 집중적으로 (도·감청)했다고 하면 심각한 문제겠지만 모든 나라가 한다. 대한민국은 안 하겠나"라고 말했다.

반면 직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을 맡은 윤상현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대표 및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 참석해 이번 의혹과 관련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윤 의원은 “사실 미국이 우리를 도청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도청했고, 미국에 있는 한국대사관이 도청당하고 있다는 발언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대통령실도 불법 도·감청 지대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며 “비공식적으로라도 사실관계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석 전 대표도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결국 이번 감청사건으로 한미정상회담 결과는 X2 부스터를 달았다"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배알도 없었다고 두 배로 욕먹을 것이요, 결과가 좋으면 이번 사건을 동맹국의 입장을 고려해 잘 무마해서 그렇다고 할 테니, 선택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잘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유승민 전 의원은 전날 밤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나와 “대통령실에서 미국한테 항의는 안 하고 (문서가 위조됐다고) 약간 논점을 비틀기를 하는 것 같은데 미국 측은 위조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를 안 하고 있다”며 “대통령실에서 그렇게 몰고 가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고 공식적으로, 대외적으로 우리나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엄중하게 항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