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한국 4월15일자 31면 게재

장금식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장금식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도가 너를 앗아가 버렸다. 나의 분신이자 생명과 같은 존재였는데 어쩌나. 지금쯤 바다 어디쯤에서 길을 찾으려 헤매고 있을까. 부주의했던 마음과 회한이 에메랄드빛 바다를 거무죽죽하게 채색한다. 토막토막,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의 점들이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가닿는다.

아, 녀석과 이별한 적이 또 있었다. 몇 년 전, 외국의 한 야생공원에 갔을 때 나무 꼭대기에서 놀던 원숭이 한 마리가 폴짝 뛰어내려 심술궂게 녀석을 낚아챘지. 바다도 동물도 네가 탐이 났나 보다. 그래도 나만큼이야 아낄까. '너 없는 나는 청맹과니'나 다름없지. 남편과 지낸 시간보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거늘, 저 거센 물결에 휩쓸려 상처를 입거나 불구의 몸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커.

불안한 내 마음을 부추기듯, 파도는 연신 갯바위를 두드리고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고 있어. 해변에 울려 퍼지던 음악은 바람의 기세에 눌려 소리가 잦아들고, 날아갈 듯 펄럭이는 파라솔 밑에서 호객하는 상인의 목소리가 바람에 갈라지고 있어.

너를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은 나만의 심정일까. 너는 진즉부터 자유가 그리웠을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 내게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며 파도와 너울너울 얼크러져 춤사위를 즐길지도 모르지. 그러나 자유엔 늘 대가가 따르는 법. 새로운 세상, 낯선 것에 관해 지나친 호기심은 너를 또 다른 감옥에 가둘 수도 있어. 

흑과 백, 보이는 바위와 암초, 각진 모서리와 둥근 사물을 구분하며 유영해야 할 거야. 바다란, 광대무변한 시간이 모아놓은 다양성의 집합소일 수도 있거든. 출렁이는 바다에서 각양각색의 존재들과 만나면서 이방의 시선과 맞닥뜨리는 어려움도 겪어야 할 거야. 조심해.   

나는 지금 해변에 앉아 네가 만날 존재들을 상상해. '파란 앵무새 물고기'를 만났다고? 몸에 온통 푸른색을 띠고 있으니 너를 청안한 눈으로 바라봐줄까. 언제나 너를 '청안시'로 대하는 친구가 곁에 있으면 큰 힘이 되지. 네가 깊은 해저에서 위험한 존재들과 부딪히지 않게 길을 잘 안내해주면 정말 좋겠네.

몸이 하얀 어종들은 마음도 백옥일까. '넌 우리와 다르니까 저리 가' 레이저 눈빛을 쏘며 '백안시'하진 않을까. 그렇다고 그 눈빛에 질려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진 말아. 한번 심연으로 가라앉으면 다시 솟구쳐 오르기가 쉽지 않거든.

바다 전경. 사진=최기환 사진작가 제공
바다 전경. 사진=최기환 사진작가 제공

아예 무관심하게, 있어도 없는 듯 등 돌리며 '등한시' 하는 녀석들도 있겠지. 뾰족 가시가 달린 성게나 별처럼 생긴 불가사리에 찔려도 도움은커녕 우리 동네에서 얼쩡거리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냉혈 패거리도 있겠지. 

바닷속이라고 서열이나 갑질, 텃세가 없겠니. 곁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어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자기 일 아니면 모르는 척 '도외시'하거나, 오히려 깔보고 업신여기며 '경시'하는 족속들이 인간 세상에만 있겠니. 네가 인간들에게 베푼 헌신의 가치를 그들은 알 수가 없지. 안다고 한들 인정하려 들지도 않아. 

가자미 족처럼 눈을 가늘게 모아 뜨고 흘겨보면서 '흥. 그래 봤자 넌 신입 초짜야'라고 일부러 '무시'하지 않으면 다행이야. 시선의 스펙트럼은 각양각색, 왜곡의 파동은 나열하기도 역부족이야. 거기도 기선잡기 대장이 있겠지. 마음에 완장을 찬 채 '하찮은 게 뭘 아느냐?' 라고 교만하게 아래위를 훑어보며 '멸시'도 하겠지. 네가 '천시'당하거나 '괄시'라도 받으면 어쩌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시선은 생각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야. 누가 뭐라든지 의연하게 대처하면 돼. 네가 없으니 외부에서 들어오는 데이터도 제로 상태가 되어가네. 뇌도 고요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아. 잠시 잡념에서 벗어나는 것도 나쁘진 않아. 참선의 세계에 접어든 듯 텅 빈 것에 대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도 맛보게 돼. 

그런데 내가 여태껏 무얼 본 거지? '청안시' 하나만 빼고는 온통 부정적인 시선뿐이잖아. 살아가면서 그만큼 나쁜 시선과 더 많이 부딪혔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의 '착시'일지도 몰라. 세상을 더 밝게 보려고 너와 한 몸이 되었는데 잡티부터 봤나 봐.

바닷물은 아직 쪽빛이고 하늘도 그대로 비춰. 너를 찾으려면 해저 지도라도 펴놓고 보물찾기를 해야 할까 봐. 그러나 그것도 생각뿐이야. 바닷가를 지나는 사람들이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 두리번거리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봐. 저들의 마음엔 어떤 시선이 담겨있을까. 

나는 안경을 잃었다. 사물이 겹쳐 보이는 바닷가에 서서 인간사의 바다를 연상하면서, 진정한 시선에 대하여 생각한다. 동행인은 녀석을 찾느라 아직도 바다 한가운데서 자맥질을 한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눈앞이 어질어질 흐릿하다. 그만 찾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쳐본다. 그가 나오면 얼른 낙산해변 근처에 있는 안경원을 찾아봐야겠다.

◆장금식 주요 약력

△경북 칠곡 출생 △'계간수필'(2014) 등단 △수필집 '내 들판의 허수아비' '프로방스의 태양이 필요해' △현재 '인간과문학'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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