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최기환 제공
사진=최기환 제공

성산포 한 달 살기를 시작한 지 십이일 째. 태풍 마이삭이 상륙한다고 한다. 아침부터 창 앞에 쭈그리고 앉아 바다만 바라본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진다. 먼 먼 바다로부터 흰 띠를 두른 파도가 끊임없이 달려온다. 

요 며칠 동안 연인처럼 감미롭던 바다가 아니다. 산다는 것도 이처럼 변덕스럽다. 한없이 이어질 것 같은 행복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도 없다. 흐르고 변하는 것에 몸을 맡겨야 하는 것은 인간을 비롯한 슬픈 짐승들의 운명이다. 어느덧 바다와 하늘이 회색으로 한 몸이 되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닷가 앞 '폭풍의 언덕'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고스란히 폭우를 맞고 있는 빈 의자들이 애처롭다. 땅에 뿌리를 내린 야자수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긴 몸으로 울고 있다. 태풍의 상륙시간이 가까워지자 시야가 폭우로 막힌다. 바다가 보고 싶어 1층 로비로 내려간다. 밖이 위험하다며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현관 입구에 선 채 바다를 본다. 

바다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달려들며 울부짖는다. 평화가 깨진 바다는 고통스러워 보인다. 도로변엔 미처 흘러가버리지 못한 빗물이 춤을 추듯 날아다닌다. 그 질주하는 광란의 몸짓을 보고 있자니 당혹스럽게도 어떤 해방감이 느껴진다. 심연에 잠겨 남몰래 신음하던 영혼이 잠시 자유를 찾은 것처럼.

숙소로 올라와 절해의 고도에 갇힌 것인지, 자발적 유폐인지 생각해 본다. 앞의 것은 고립이고 뒤의 것은 고독이다. 고립은 히스클리프의 미친 영혼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고독은 영혼을 자유로 이끈다. 내게 묻는다. 나는 진정 자유로운가.

태풍이 지나가는 저녁 8시가 되자 돌연 암흑에 휩싸인다. 정전이란다. 할 수 없이 다시 로비로 내려간다. 로비만 빼고 6개 동 리조트가 모두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백여 개의 객실에 투숙객은 나를 비롯한 십여 명뿐이다.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제 아침 주차장에 차량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알아챘어야 했다. 

태풍이 줄지어 올라오는 시기에 바닷가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한 나처럼, 남아있는 사람들도 인지능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이거나 문득 찾아올 해방감에 목을 축이려는 사람들인 것 같다. 정전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이렇게 큰 태풍은 4년 만에 처음이란다. 숙소로 올라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창 앞에 앉았다. 고개를 파묻고 폭풍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캐서린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다. 운명처럼 닥친 사랑에 생의 전부를 걸었던 사람, 오직 한 번,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했던 그가 캐서린의 죽음 앞에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모습이다. 사랑을 잃고 복수의 완성으로 사랑의 완성을 이룬 지독한 사랑. 그런 사랑 한 번 안 해보고 어찌 그를 꾸짖기만 하겠는가. 

어둠 속에 있으니 어둠이 환하다. 저 어둠 속 밤바다를 향해 가고 싶다. 저 바다를 헤엄쳐 가면 그리운 사람이 있는 곳에 닿을까. 그곳에서 서로의 눈빛을 고요히 바라볼 수 있는, 내 등을 두드리며 잘 살았다고, 애썼다고, 네 슬픔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한 마리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풍과 마주하고 있으니 비장해진다. 여러 겹의 우연이 만든 필연처럼, 오고야 말 그런 순간이 닥친 것처럼. 그런데 언제 잠이 든 것일까?

햇살이 유리 비늘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이다. 기적처럼 세상이 웃는다. 어젯밤의 광란은 황홀한 고통이었다. 창밖으로 다시 우도가 보인다. 별일 없이 안녕하다고, 무사하다고 태연하게 눈인사를 한다. 아침 일찍 산책을 나선다. 태풍의 여파로 아직 바람이 강하다. 주택가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야자수 껍질이며 빈 플라스틱과 온갖 쓰레기들이 흉물스럽게 흩어져 있다. 

해안로에 설치된 난간들이 안타깝게도 여기저기 부서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철근 못으로 고정했던 플라스틱 기둥이 힘에 부쳐 쓰러진 것이다. 가벼운 것들은 멀리 날아가 흩어졌지만 무거운 것들은 제 발밑에 처참히 부서져 있다. 가벼우면 자유롭고 상처도 작지만 무거운 것들은 회복불능의 상처를 입는다.

해안가에 쌓여 냄새를 풍기던 바다풀들도 자취를 감췄다. 깊은 바다 속까지 뒤집는 바람의 힘을 따라 대부분 파도에 휩쓸려 간 듯하다. 삶에도 어려움이 클수록 내면의 오염과 찌꺼기들이 더 깨끗이 비워지는 것 아닐까. 고통을 견뎌낸 후에 찾아오는 말간 평화는 얼마나 뿌듯한가. 악취를 풍기던 연못도 푸르게 꿈틀거리고 해안가엔 백로가 떼 지어 먹이를 찾는다.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새들이 눈부시다. 하늘 높이 뻗은 야자수들의 미끈한 몸매가 시선을 끌어 올린다.

출렁출렁 바닷물을 안고 돌아오는 길, 숙소 앞 야자수 발밑에서 키 작은 빨간 꽃을 본다. 옆 화단에도 노랑꽃들이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다. 어제 그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은 기특한 생명들이다. 작고 가볍고 부드러운 것이 이긴다. 고난과 역경을 견뎌낸 것은 모두 생기로 빛난다. 꽃들의 생기를 안고 한달음에 바닷가 '폭풍의 언덕'에 오른다. 어디선가 히스 꽃  향기가 전해오는 듯하다.

◆정진희 주요 약력 

△서울출생 △에세이플러스'(현 한국산문.2007) 등단 △한국산문 출판국장 △대담집 '외로운 영혼들의 우체국', 수필집 '우즈강가에서 울프를 만나다' '떠나온 곳에 남겨진 것들' △윤오영문학상, 남촌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 신인상, 박종화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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