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연의 리얼 가요사

나훈아 김지미. 사진=방주연 제공
나훈아 김지미. 사진=방주연 제공

1968년 9월 제주 지역 최초의 민영방송인 남양 방송 주식회사(약칭 NBS)가 설립, 개국했다. 1971년 10월 남양 방송에서 남양 문화방송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1984년 1월1일 남양문화방송에서 제주 문화방송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71년도 이를 기념하기 위한 개국 쇼에 국내 최대 연예인이 전세 비행기를 차고 제주도에 갔다. 10대 배우, 10대 가수, 10대 탤런트, MC, 오케스트라 등 수십 명의 주인공들과 옆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수행하는 매니저 등을 합치면 200여명이 움직이는 큰 잔치였다. 그때까지 제주도 역사상 그런 빅쇼는 없었고 제주도민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그 전세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신인가수의 때를 막 벗은 뒤 고공행진을 하던 중 영화계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때는 남진이 노래와 영화에도 출연을 병행 미남 가수 미남 배우로 활동했다. 나훈아는 그런 모습이 부러워 영화 출연의 기회를 엿보던 때였다. 

내가 출연할 영화 제목은 '귀향'(김효천 감독)인데 주인공을 하라는 것, 그러기에 좀처럼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영화계의 거목들에게 연기 지도를 받을 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오락가락하면서 한군데에서 4회씩 총 8회 생방송 스케줄이었다. 그러기에 연기 지도를 받을 여유가 없었다. 

김지미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김지미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제주시에서 공연이 끝나면 서귀포 무대를 향해 중형 세단에 몸을 싣고 달렸다. 제주 방송국이 그런 여유를 우리에게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훈아는 분장실에서 순발력을 발휘했다. 양담배를 입에 문 영화계 거목 김지미에게 냉큼 다가갔다.

당시 김지미는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 불렸다. 그녀는 1950년대~1960년대 초.중반에 최은희 등의 선배와, 1960년대 중.후반에는 남정임, 윤정희, 문희 등의 후배 트로이카와 경쟁했다. 2016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당시 나훈아는 라이터를 탁 켜 불을 붙이며 남자답지 않은 애교를 떠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남진, 박일남, 윤항기 선배와 키득키득 웃었다. 그래도 나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김지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핑크빛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왜 저러지? 나훈아는 경상도 부산 남자 성격이었지만 때로는 애교 있는 몸짓을 할 때도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대선배 영화계의 선배를 예의 바르게 모셔야 하는 새까만 후배의 자세였겠지? 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이쪽저쪽 오락가락하면서 정신이 없었다. 그런 스트레스로 과민성대장 증후군이었던 나의 뱃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극장 뒤편 화장실을 간 일,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볼일을 봐야 하니 앞뒤 생각할 겨를없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누구든 그랬을 것이다. 그때 아~ 아~아~악~새까만 돼지새끼들과 어미돼지가 우루루 내 쪽으로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기막히는 그 상황. 대한민국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겪은 적이 있을까? 

35세 방주연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35세 방주연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후다닥 뛰쳐나온 나는 십년감수 기절초풍에 온몸이 진땀으로 흠뻑 젖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 상황을 모르면서 윤항기 선배는 내게 "주연아 무슨 일 있어 오빠가 해결해 줄까? 아유 이뻐"하면서 핑크빛 멘트를 보내왔다. 그 일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나는 그냥 엉엉 울어버렸고 서러워서 한숨만 나왔다. 그래도 가수는 무대에서의 자기 순서가 중요한 일이다. 노래가 잘 될 리가 없었다. 

겨우 무대를 모두 마치고 호텔에 돌아가서야 볼일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도 흑돼지, 제주도 똥 돼지는 그렇게 화장실 속에서 길러지고 비싼 값의 명품돼지로 팔린다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겪은 제주도 화장실 사건과 나훈아가 김지미에게 흑심을 품고 다가간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나는 화장실 트라우마로 어디를 가던 화장실 위치와 위생 상태를 먼저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아침 공항에 다들 모였지만, 김지미 나훈아는 보이지 않았다. 기혼자인 사실을 숨겼던 나훈아는 이혼(1975년)했다. 그리고 김지미와 상상을 초월한 연상연하 커플이 되었다. 

탤런트 김형자, 방주연  사진=김성환 제공
탤런트 김형자, 방주연 사진=김성환 제공

그 시절 유명 주간지 주간경향 이상벽 기자는 김지미 나훈아 두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두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힘과 돈의 결합물'이라고. 김지미는 여러 번의 결혼 전력이 있다. 그중 가장 후회스러운 결혼이 나훈아였다고 후일 밝혔다. 나훈아는 오히려 거목의 위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내 또래 탤런트 김형자는 노래 취입을 할 정도로 노래도 잘 부른다. 김형자는 영화배우와 결혼했고, 남편과는 K가수와의 외도로 둘은 결별했다. 

◆ 방주연 주요 약력

△1970년 '슬픈연가'로 데뷔 △'당신의 마음' '자주색 가방' '기다리게 해놓고' '꽃과 나비' '정' 등 히트곡 다수 △1973년부터 4년 연속 동양방송(TBC) 7대 가수상, 최고가수상 △KBS MBC 10대 가수상 수상 △대한민국 가수 희망시대 △한국가수협회(예총1969년 설립) 여성가수 회장 △상주시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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