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옥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용옥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겨울이다.
햇살이 살아있는 시간은 짧고 그가 떠난 어둠은 길다.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든 공간은 불안하다. 불안한 것들은 불안하기에 서로 어깨를 겯는다. 산마루에 늘어선 갈참나무들이 그러하고 앙상한 나뭇가지의 까막까치가 그러하고 쌓인 눈 위에 또 내리는 함박눈이 그러하다. 눈 아래 웅크린 풀뿌리와 풀뿌리 사이를 비집고 앉은 작은 생물들의 시간도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여인들도 어깨를 겯는다. 삶의 고갯마루를 넘어선 여자들. 지인의 집 긴 탁자에 두 줄로 둘러앉은 그녀들은 서로의 마음에 마음을 기댄다. 손에 손을 얹는다. 때로 그녀들 사이로 영롱한 피아노의 선율이, 묵직한 첼로의 울림이, 바이올린의 가녀린 흐느낌이 넘나든다. 오선을 트램펄린 삼아 뛰노는 음표들에 잠자던 물상들도 덩달아 깨어나고, 창밖에는 눈이 온다. 오다 그치고 또 온다. 여인들의 마음에 눈이 쌓인다. 마주앉은 그녀들의 어깨 너머로도 눈은 내리고 또 쌓인다.

건너편 새집에도 눈이 내린다. 봄 가으내 지은 기다란 슬래브 건물의 지붕과 마당, 도자기 꽃을 새겨 넣은 현관 바닥으로 눈이 내린다. 눈은 꽃을 지우고 꽃은 눈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꽃이 피는 동안은 겨울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듯 꽃은 필사적으로 피어나려 한다. 여인들이 그 현관을 지나 새집 안으로 들어선다.

'CAFE'라는 간판이 붙은 새집 옹벽에는 '엄마 어렸을 적엔...' 이란 걸개그림이 걸려있다. 둥글 넙적한 얼굴에 빠끔한 눈, 뭉툭하게 주저앉은 코, 친근하기 그지없는 헝겊인형들은 그 갤러리 카페에 전시된 작품의 등장인물들이다. 그들은 미니어처 같은 초가나 기와집, 함석집을 무대로 지난 시절 삶의 단면을 펼쳐 보인다. 회초리를 든 엄마 앞 앉은뱅이책상에서 눈물콧물 흘리며 숙제하는 어린아이, 호박넝쿨 감아 오른 낮은 담장 너머로 음식을 넘겨주며 정을 나누는 이웃, 웃통을 벗은 채 등목 차례를 기다리는 우물가의 꼬맹이들... 잊혔던 풍경이 시간을 건너 달려온다.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것들을 타고 되살아난다. 지금 이 집에 내리는 눈은 현재형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완료된 시간, 그리움 그것이다.

오늘처럼 눈 내리는 저녁이었을까. 초가집 안방 화로 위 삼발이엔 된장찌개가 보글거리고, 방구석엔 삼베보자기 덮인 밥상이 놓여 있다. 화롯불 곁 엄마는 구멍 난 양말을 깁고, 아랫목 이불에 발을 들인 삼남매는 만화책에 빠져있다. 그들의 발치 아래 묻어놓은 밥그릇 임자는 누구일까. 이불 속 밥주발은 뚜껑이 열린 채 나뒹굴고 있다. 밀고 끌며 이불 다툼을 하던 삼남매가 밥주발을 건드린 것이 분명하다. 전시된 유리통 속의 입체형 풍속도. 무대는 완성되었고, 곧이어 펼쳐질 상황이 흥미롭다.

어떤 주인공이 등장할까. 텁석부리 포수 아버지가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산토끼 몇 마리를 메고 나타나려나, 거나하게 취한 술꾼가장이 장보따리를 짊어지고 비척거리며 들어오려나, 8:2 가르마의 양복쟁이 신사가 서류가방을 옆에 낀 채 반전 있게 입장하려나. 상보를 벗기고, 그 상에 된장찌개를 올리고, 마침내 이불을 들추었을 때, 이불 아래 쏟아진 밥을 본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옛날 우리 집이었다면?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어머니는 쏟아진 밥덩이를 주워 담으며 지청구 꽤나 하셨을 테고, 너그러운 아버지는 너털웃음 허허거리며 된장찌개에 밥 한 그릇을 달게 비우셨을 게다. 눈앞을 스치는 장면들은 상상일까, 회상일까. 전시된 모형 작품 한 점이 숨은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마음을 데운다.

카페 여주인 부부도 꽤나 금슬이 좋았나보다. 취미로 만들던 봉제 인형에 옷을 입히고 집을 지어주고 스토리를 얹어주다 발견한 시간. 기억에 기억을 더하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보태며 추억이라는 낱말로 옛것들을 소환할 때,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소꿉놀이하듯 마주앉아 시간을 살려내던 지아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혼자다. 알콩달콩, 때로는 달콤 살벌하게 둘이서 만들어냈던 이야기들도 남편의 타계와 함께 과거형이 되었다. 그 시간을 그저 잠재울 수 없었던 그녀의 집념이 새 집을 짓고, 작품들을 전시하고, 이 시골마을에 갤러리카페까지 열게 한 것이다.

문을 연 첫날 카페에 들른 여인들은 전시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듣고, 차를 마신다.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문득 말을 멈추고 자리를 뜬다. 애써 눌렀던 감정이 복받친 것일까. 앙상한 뒷모습. 그녀는 이제 누구와 어깨를 겯고 남은 시간을 채워갈까. 작고 외진 마을에 새로 연 카페, 창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린다.

여인들은 다시 지인의 집 대문으로 들어선다. 회색 건물을 둘러 싼 백색 공간은 순백의 도화지다. 길고양이의 발자국만이 담장을 따라 규칙적인 두 줄 흔적을 남겼을 뿐. 나는 그 순결한 공간에 발자국을 찍는다. 한 발의 뒤꿈치를 고정시킨 채 발끝을 돌려가며 새하얀 눈꽃을 피운다. 열 개의 꽃잎이 서로의 어깨를 붙들고 탄탄하게 균형을 이룬다. 그 꽃을 구심점으로 다른 한 발도 부지런히 동심원을 그린다. 견고하게 피어난 눈꽃, 그 꽃잎들은 이 둥근 울타리 안에서 또 하나의 겨울을 지탱해나가리라.

창 밖에 서서 창 안쪽을 들여다본다. 따스하다. 여인들의 웃음이 따스하고 나누는 이야기가 따스하고 그들 사이를 흐르는 음악이 따스하다. 따스한 그들은 따스한 언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걷어 올려 따스하게 덥히고 또 데운다. 황량한 시베리아 설원을 헤맬 것 같은 지바고의 영혼도, 눈 위를 뛰고 달리다 엎어지고 드러눕기를 반복할 것 같은 올리버와 제니의 사랑도 저 공간 안에서는 따스한 수증기로 기화될 것만 같다. 눈 위에 발을 딛고 따스한 시간을 들여다보는 나의 반은 따스하다. 나머지 반은 춥고도 쓸쓸하지만 나는 아직 눈 내리는 창 밖에 서있고 싶다.

흰 눈이 쌓이듯 세월이 쌓이고, 그 눈이 녹아내리듯 세월은 흘러갈까. 우리들의 삶도 그러할까.

오늘, 겨울이 마음에 내린다.

◆ 이용옥 프로필

△계간수필 등단(2013), 한국수필 평론 등단(2022) △수필집 '석모도 바람길' △수필미학 문학상, 율목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희곡, 동화 부문 수상 △계수회, 수필문우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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