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주 '꽉'...인간과 문학. 2024년 겨울호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 
좋은 문학은 이 질문을 토대로 구축된 건축물이다. 이 물음은 독자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키다가 내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튼다. 그리고 때때로 솟아올라, 카프카의 표현을 빌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깬다.

임승주의 <꽉>은 인생을 상자와 산 오르기에 비유하여, 소유에 대한 집착과 이른바 '정상(頂上)'에 대한 사유를 풀어낸 글이다. 상자를 축으로 한 이야기에서는 집착에 거리두기까지의 도정을, 산의 이야기에서는 정상에 오르지 않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성찰하게 한다.

어린 시절, 인형 놀이보다 딱지치기를 좋아해 '여왕벌'로 군림했던 작가와 달리, "어쩐지 심약한" 동생은 번번이 딱지를 잃고 울며 돌아왔다. 그런 동생에게 딱지를 주면 울음을 그쳤으므로, 어린 마음에 딱지는 '만병통치약'이자 '보물'이었다. 내복이 담겼던 빈 상자에 딱지를 가득 채우면, 이 무용했던 '곽'은 보물을 보관한 '금고'인 '꽉'으로 격상한다. 동시에 '꽉'은 힘주어 움켜잡는 태도와 꽉꽉 채우려는 욕구를 상징한다.

그때는 "왠지 재수가 좋"아 쉽게 딱지로 채웠지만, 어른이 되어 꽉을 채우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잘난 사람이 넘쳐나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곳'이므로. 그리고 '꽉을 절로 채워줄 행운 같은 것'은 없었고, 꽉을 "쥐면 쥘수록 구겨져 갔고 공간은 줄어 들었"으므로.

어른의 꽉에서는 '땀과 피 냄새'가 나며, 삶이란 '벌판 위 외로운 싸움'임을 알게 된 뒤, 나아갈 길은 어디일까? 바람이 불고 불안이 묻은 시간을 지나며 자신이 '허약한 존재'임을 깨닫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얼마나 많을까?

적성에 맞지 않던 첫 직장을 그만둔 후 매번 출발선에 다시 서는 중인 동생을 보며, 작가는 정상에 오르는 대신, 산 아래에서 느긋하게 둘레길을 돌며 살아가는 삶도 있음을 터득한다.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희열만큼 산 아래서 올려다 본 경험도 의미가 있으며, 사람마다 "목표지점과 체력과 감상 취향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제 갱년을 이야기하는 나이에 이르러 작가는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을 본다. '여유와 너그러움'이 깃들지 못했던 연유를 파악한다. 이제 꽉에서 거리를 둘 수 있고 꽉을 채우는 것은 세상의 것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채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에서, 독자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꽉은 더 이상 욕망과 집착의 상징이 아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꽉은 '생에 대한 애착'이며 '삶을 지탱할 기둥'이었고 그래서 '달콤하고 유쾌한 것'이기도 했음이 보인다. 이처럼 꽉의 양면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꽉을 놓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미 자유로운데...

◆ 한혜경 주요 약력

△서울 출생 △명지전문대 명예교수 △<계간수필> 수필 등단(1998) △<한국문학평론> 평론 등단(2002) △평론집 <상상의 지도> <시선의 각도> △글쓰기 이론서 <말 글 삶> <생각 글 말-내 안의 가능성을 보다>△수필집 <아주 오랫동안> <시간의 걸음> <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4인 공저) 등이 있다.

♣꽉-글/임승주 

동생이 울며 들어왔다. 
키는 큰데 어쩐지 심약한 내 동생은 번번이 모든 딱지를 잃고 울며 들어왔다. 그런 동생에게 딱지 열 장 정도를 용돈 주듯이 건네면 울음은 금방 그쳤다. 이 신통한 약을 봐라. 난 그래서 더욱 딱지 수집에 몰입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세상의 많은 것을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딱지였다.

한번은, 얼굴과 몸통, 다리에 솜을 넣은 하얀색 사람 인형을 엄마가 만들어 주었다. 머리에는 몇 가닥 머리털 역할을 하는 털실이 나 있고 눈코입을 볼펜으로 그려 넣은 그것은 내 취향이 아니었던지, 반나절 갖고 다니다가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잊었다. 나는 딱지와 구슬에 열중해 있었다. 지름 약 4센티미터의 동그란 딱지는 만화 그림이 중심에 있고 가장자리를 따라 작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한 개 있는 것부터 여러 개 있는 것까지 서로 다른 개수의 별이 그려져 있었다. 뒷면은 섞고 접을 때 앞면의 모양을 알 수 없도록 서양 카드처럼 빽빽하게 체크무늬가 있었다.

빨간 내복이 담겨왔던 빈 상자는 내 소중한 보물을 보관할 수 있는 금고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 상자를 '꽉'이라 불렀다. 곽이지만 꽉 이라고 발음했다. 거기에 딱지 백 장 정도를 세워 쌓으면 높이가 딱 맞았다.

나는 가끔 '내 꽉 건드리지 마!'라며 엄포를 놔야 했다. 늘 부러움과 존경심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동생이 내 꽉을 탐낼 수도 있고, 이쪽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엄마는 내 꽉을 쓰레기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손대면 죽는다는 으름장은 먹혔다.

시간이 나는 대로 양쪽 주머니에 딱지 각 백 장씩 넣고 동네로 나갔다. 나가면 어김없이 애들이 몰려있었다. 숨바꼭질 같은 것을 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 딱지와 구슬이 대세였다.

딱지놀이에는 우선 '치기'가 있다. 테이블 위에서 엄지와 중지를 모았다가 중지를 튕기며 누워있는 딱지로 상대방 딱지를 테이블 바깥으로 밀어내는 치기가 있고, 딱지를 세워서 누워있는 상대방 딱지를 직접 쳐서 뒤집는 치기가 있다. 그리고 '접기'다. 딱지를 잘 섞은 다음, 앞면이 안 보이도록 고사리 양손에 각각 야무지게 오므려 내민다. 그 양손 중에 별이 많은 쪽을 선택하면, 걸은 딱지 개수만큼 먹는 거고 적은 쪽이면 먹히는 거다. 나는 왠지 재수가 좋았다.

그쪽 세계로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 세계의 여왕벌이 되어 있었다. 머리 하나는 더 달린 내 키 때문이었기도 했고 결정적인 것은 갖고 있는 딱지의 양 때문이었다. 간혹 내게 낡은 중고 딱지를 사려는 아이들이 찾아오곤 했다. 당시 새 딱지는 A4보다 조금 더 큰 마분지에 대략 삼십 장 정도 붙어있었는데, 같은 돈으로 나는 백 장 넘게 낡은 딱지를 내주곤 했다. 그렇게 돈이 생기면 구멍가게로 가서 약한 단맛이 도는 식용 고무줄, 쫀드기와 라면처럼 곱슬곱슬한 과자, 라면땅을 사 먹곤 했다.

그런 딱지와의 사랑은 국민학교를 졸업하며 동네를 벗어난 후 잊혔다. 
이후 세상에 나와 더 훌륭한 사람을 만나고 더 세련된 것을 보게 되고 맛있는 것도 원하는 대로 사 먹을 수 있어서 어릴 적보다 나는 더 행복해졌다, 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세상은 잘난 사람이 넘쳐나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곳이었다. 더욱이 꽉을 절로 채워줄 행운 같은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세상이 그렇게 나올수록 나는 꽉을 더 세게 꽉 쥐었으나 쥐면 쥘수록 구겨져 갔고 공간은 줄어 들었다.

어릴 적 그것과는 달리 어른의 꽉에서는 땀과 피 냄새가 난다. 그것이 열정이든 욕망이든 벌판 위 외로운 싸움은 누구에게나 고된 일인 거 같다. 가끔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묻지만 어디서도 찾기 쉽지는 않다. 바람이 불고 그 바람 한 줄기에 불안이 묻어왔다.

동생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자주.
지적학과를 나와 한국국토정보공사의 전신인 대한지적공사를 다녔다. 우리 국토를 날다람쥐처럼 뛰어 돌아다니며 강산의 맛집을 두루 맛볼 기회를 몇 년 지나지 않아 스스로 저버렸다. 토지와 토지 사이의 첨예한 경계를 긋는 일, 현실은 작업화를 신고서 거친 나무를 헤치며 산을 타고 밭을 건너다녀야 하는 일이라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매번 출발선에 다시 서는 일이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했고 두려운 거였겠지만 그것도 그럭저럭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삶이 되었다.

산을 오르는 데는 저마다 목표지점과 체력과 감상 취향이 다르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이 있지만 아예 정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산의 중턱쯤에서 산소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거나 둘레길만 걷다가 산 초입 가게에 앉아 탁주 한잔하며 평상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오르다 보면 무릎도 닳고 자칫 넘어져 힘들더라도 정상에서 내려다본 경험은 희열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아래서 산을 오랫동안 올려다본 경험 또한 좋은 거 아닐까. 내려다보았다면 낮은 산과 마을이 보이는 거고, 올려다보았다면 하늘과 높은 산이 보이는 거 아니겠는가. 시각의 차이로 다른 걸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산 아래서 느긋하게 하늘을 안주 삼아 탁주 마시고 둘레길을 돌았던 동생이 산 위의 전망을 보지 못했다 한들 어떠하랴. 뭔가 다른 걸 봤을 테니 말이다.

젊은 날 정상에 대한 나의 집착은 어릴 적 '꽉'을 잡은 손만큼이나 강렬했다. 그러고도 정상까지 오르기란 열정만큼이나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고 적극적으로 성취하기에는 허약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오르려 했나 하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잃어버린 것 또한 크기 때문이다. 오르는 동안 즐거움보다는 성급한 마음에 지쳐갔고 사는 모양새가 여유와 너그러움이 없었다. 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나보다 동생은 많은 걸 양보할 줄 아는 넓은 마음으로 살아온 걸 보면.

동생의 이마는 끊임없이 기어올라 어느덧 태양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철삿줄 같았던 내 머리털도 빗질 몇 번이면 제압되는 그런 날이 왔다. 올 게 오고야 말은 건 데, 어쩐지 반갑지 않고 낯설다. 연년생인 우리 남매가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사춘기를 훌쩍 넘어 서로 갱년(更年)을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다. 여기서 갱(更)은 '다시, 바뀌다, 새로워지다, 고치다'의 뜻이어서인지, '꽉'을 움켜쥐었던 손아귀의 긴장이 풀린다.

일생 곁에 딱 붙어있던 꽉에서 나는 이제 좀 거리를 둘 줄 알게 되었다. 세상 밖에서 말고 내 안에서도 채울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꽉'은 다른 의미가 되어간다. 그렇게 가지려고, 더 가지려고 애쓰던 내 사랑 '꽉'은 어쩌면 생에 대한 애착이었고 삶을 지탱할 기둥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무척이나 달콤하고 유쾌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선가. 갱년 앞에 호승심(好勝心)은 무릎 꿇었지만 생을 짓는 마지막까지 '꽉'을 놓아주지는 못할 거 같은, 어쩌지 못할 거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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